2017년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목소리로 한국교회의 개혁과 변화를 외쳤다. 한국교회의 외침은 한마디로 공허했다. 기독교의 진리를 보지 못했다. 한마디로 반민족적이며, 반평화적이었다는 결론이다.

한국교회는 민족사와 민족의 문제, 교회 분열과 일치의 문제, 민족과 세계의 평화, 하나님의 나라 온 피조물을 위한 기도, 교회 안에서 여전히 소외되고 있는 여성의 문제 등 기독교적 의미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에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며, 팍스에 의한 평화만을 외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어둠 속에 있던 이 민족에게 하나님은 빛과 구원이었다. 그것은 마치 서양의 기독교 선교가 아니었더라면, 이 민족이 암흑 속에 묻혀 있을 뻔 했다는 말은 아니다. 한국 기독교선교는 지난 130년의 한민족에게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130년의 기독교 역사는 반민족인 요인들을 간과해 버린다. 기독교 선교와 한국기독교가 민족의 자주적 근대화의 잠재력을 약화시켜버렸고, 좌절시켜버렸다는 것이 일반 사가들의 견해이다.

일부 목회자와 교인들은 이 같은 비판에 공감하면서,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 주저해 왔다. 그럼에도 이들은 한국교회와 한민족의 근대사를 들추어 보면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일반 사가들의 비판이 옳다는 것을 발견하고, 다윗문화와 바벨문화에 갇혀 있는 한국교회와 한국기독교의 변화와 개혁을 촉구했다.

특히 한국교회는 영미선교사들이 가져다가 준 교파주의에 매몰된 나머지, 한국교회를 분열과 갈등의 늪으로 빠트려 버렸으며,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적 경제체제 하에서 신의 자리를 맘몬으로 대치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신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이고, 그의 성체는 미국 달러이며, 그의 미사는 환율조정이고, 그의 나라는 자본주의적 보편문명이다.

기독교 선교 초기에 이 민족은 ‘어둠 속에’ 처해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피압박 민족에게 구원의 빛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선교사들이 구원의 빛을 가져왔다는 말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에서의 선교는 하나님 자신의 선교라고 말해져야 한다.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사들을 뛰어 넘는다. 이 민족의 구원을 성취하리라는 신앙에서,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둠 속에 있던 이 겨레에게 빛과 구원’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는 이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함은 서양기독교 선교와 한국기독교의 성립 이전부터, 우리가 하나님을 고백하기 이전부터, 영원부터 고백되어 졌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이를 망각하고, 현상적인 것들로 한국교회를 평가하며, 교회개혁을 외친다면, 그 길은 엉뚱할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의 변명 밖에 될 수 없다.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가진 기념행사는 이벤트성 기념행사에 불과했다는 지적에 대해 모두가 공감한다. 행사로 끝나버린 것이다. 한국교회가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하고,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에 교회가 없는데, 개혁과 변화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분명히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삶의 현장’과는 멀리 있다.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바벨탑을 쌓고, 아버지 목사를 잘 만나 부와 명예와 권력을 한 번에 얻는 세습목사가 교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모습은, 종교개혁이란 이름조차 입에 올려서는 안 될 것 같다. 더 이상 한국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이용하지 말라. 교회를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 세우라. 그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변화이며, 개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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