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적인 민족통일을 말하자

요즘처럼 한반도의 평화가 간절한 때가 없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들의 적대적 발언과 경제보복, 남북한전쟁을 위한 긴장고조 등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다 북한은 핵무기 개발과 연이은 미사일 도발로 한반도는 물론, 미국을 비롯한 유럽, 주변국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또한 평화를 말해야 할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무기경쟁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물론, 핵무기 무장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예수님이 거부하고, 악으로 본 ‘팍스’에 의한 평화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예수님은 ‘샬롬’을 통한 인류에게 평화를 주러 왔다고 했다. 남북한의 핵무기 경쟁은 일본, 중국, 러시아 등의 주변국의 핵무기 경쟁으로 이어질 것은 뻔하다. 또한 베트남을 비롯한 미얀마,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의 핵무기 경쟁을 불러 올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역할은 분명해진다. 남북한 비핵화를 부르짖어야 한다. 그리고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서 평화(샬롬)를 노래해야 한다. 그런데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팍스에 의한 평화를 말하며, 남북한의 화해와 평화통일, 한민족공동체 회복을 말하는 인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한다. 남북한 화해와 평화통일을 내세우고 대통령에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그리고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문재인 씨라고 부른다. 그래도 한국교회 만큼은 군비경쟁이 한민족의 공멸을 자초한다는 것을 깨닫고,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말한 평화와 한민족공동체 회복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오늘 한반도는 수명을 다한 이씨 조선 말, 한반도가 중국과 일본(청일전쟁), 러시아와 일본(러일전쟁)의 전쟁터로 내어주었던 아픈 역사가 재현되는 것은 아닌지 국민들은 불안하다. 또 주변국들의 적대적인 발언과 일본의 평화헌법 파괴, 전쟁을 하는 나라로의 헌법 개정 움직임 등은 한반도에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 세계는 긴장하고 있다.

아무튼 세계는 한반도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한반도에서 전쟁만은 막아야 된다. 이것은 남북한을 비롯한 세계 200여 개국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 모두의 바람이다. 그런데 지금 세계는 당사자인 한민족과는 상관없이, 주변국들은 적대적 방언을 연일 쏟아낸다. 또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힘의 우위를 내세운다. 남한의 보수적인 인사들은 핵무기 무장을 촉구한다. 미국의 인사들은 한반도의 평화 유지를 위해서는 미국전략자산 배치와 북한에 대한 군사 옵션을 강조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지금 세계는, 전세계 인구 20번을 전멸시킬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어디에서 핵무기가 발사돼 상상을 초월하는 사상자를 낼지 모르는 상황이다. 한민족 모두가 북한의 핵무장에 긴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 대부분은 세계의 경제를 움직이는 무기상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또한 ‘거룩한 전쟁’이란 이름아래 기독교국가인 제1세계에 의해서 자행되었다.

제2세계가 사라진 상황에서도 신무기를 계속해서 개발되고 있다. 녹슬고 있는 총알과 대포는 녹슬고 있다. 녹슬고 있는 재래무기는 어디엔가 버려야 하는 상황에 있다. 지금까지 재래무기는 대부분 중동에 버려졌다. 무기상들이 개발하는 무기는 대부분 제3세계 독재자들이 구입한다. 독재자들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기를 제1세계로부터 무기를 사들일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가난한 제3세계 국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하늘을 향해 아우성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우성 소리를 들으시고, 이들을 파라오의 압제 밑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예수님도 가난하고, 기득권자들에 의해서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이들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셨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막아야 한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막아야 한다. 6.25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지 67년, 분단 72년이 되었다. 이제 남과 북이 하나 되어야 한다는 통일에 대한 목소리가 한국교회 안에서 외쳐야 한다. 그것은 남북한 아니 200여개국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의 요구이며, 염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화적인 민족통일은 우리민족에게 있어 양보할 수 없다. 민족통일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 절실하다. 그것은 한민족의 역사적 운명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교회가 통일논의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분단의 중심에 세계교회가 있었다. 그런데, 세계교회가 세계분단을 극복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이것은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민족분단의 중심에 있었던 한국교회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분명하다.

이러한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교권주의와 권위주의, 권력지향주의에 매몰된 나머지 반통일적인 모습을 과거나, 지금이나 계속해서 보이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통일이 되었을 경우, 많은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국교회가 가던 길을 멈추고, 민족의 영원인 평화통일의 한복판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는 이유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대목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북한은 공산주의이기 때문에 대화할 수 없고, 북한이 핵무기 개발과 연이은 미사일을 도발하기 때문에 남한도 핵무기로 무장하고, 최신의 무기를 배치해야 한다”고 관념적인 말을 서슴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한 것은 히틀러 혼자 한 것이 아니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관념이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했다.

이 같은 관념은 한민족공동체 형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않는다. 이것은 한민족의 염원인 민족통일에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한국교회가 반통일적이며,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교회가 변화되지 않고서는 한민족의 선교 경쟁력을 회복할 수 없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이제 한국교회도 민족의 소원인 평화적인 민족통일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분단을 이용해서 자신의 교회를 지키고,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성서의 정심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영미의 지배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분단 상황을 고착화 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종교개혁 500년을 맞은 한국교회는 영미선교사들이 가져다가 준 지배이데올로기 신학과 신민지 신학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것이 복음의 전부이며, 진리인양 착각 속에 빠져 있다. 성경 속에 담겨진 참된 복음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지배이데올로기적인 복음은 한민족의 분열을 고착화시켰다. 여기에서의 실패는 복음의 본질로부터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실패한 영미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와 식민지신학에서 벗어나 한민족을 새롭게 하는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한민족의 요구인 평화적인 민족통일에 응답하는 것이다.

민족의 요구에 응답하자

한국교회가 분열과 갈등에 익숙해진 나머지 기독교가 화해의 종교, 평화의 종교, 사랑의 종교, 생명의 종교, 희망의 종교라는 사실을 잃어 버렸다. 오늘 한국교회가 분단극복과 민족통일에 대해서 분명하게 답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는 통일 이후 북한선교라는 이름을 내걸고, 교인들로부터 헌금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것은 지금의 한민족선교가 아닌 미래 통일이후, 북한에 남한의 교파주의를 그대로 이식시키겠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러한 선교는 통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않는다. 우스운 것은 북한선교를 말하는 선교사들 중, 단동, 도문, 순선 등 북한과 인접한 곳에서 북한 땅을 향해 성경책을 비닐봉지에 싸서 던지고, 선교했다고 말하는 선교사들도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모습에 대해 한민족공동체 회복을 염원하는 통일신학자와 목회자들은 반통일적이며, 반민족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또 비인간화를 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분단은 여러 가지 모순이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에, 그 분단모순을 극복하자는 것이 통일신학자와 목회자의 주장이다.

한국교회는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남북한의 선교, 아니 한민족의 선교는 남한 기독교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민족 전체의 맥락에서 남북한 기독교인들이 공동으로 수행해야 한다. 종말적인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역사 내에서의 분단된 세계 양편을 초월하며, 분단을 넘어서는 새로운 미래(통일)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박순경 박사는 “북한선교라는 말은 분단을 넘어서는 새로운 선교를 암시하면서도,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북한선교의 오류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반성을 말해주지 않는다. 북한선교라는 말은 마치 북한만이 선교를 필요로 하는 피선교지처럼 들리게 한다. 그러므로 통일을 위한 한민족선교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 이 선교는 한민족 전체의 선교이다”고 자신의 저서 <민족통일과 기독교>(1986년, 한길사)에서 밝혔다.

박 교수의 말대로 서로 갈림의 상태에서는 분단을 넘어서는 새로운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서로 으르렁 거리는 맞선 대치상태의 싸움마당에서 우리민족은 잘 살 수 없다는 것에 대해 국민 모두는 공감한다. 한마디로 남과 북의 대치상태에서 북한동포들이 사람답게 살지를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는 사람답게 살수 없게 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북한의 대화와 평화, 그리고 한반도의 비핵화를 말하는 것이다.

한편 한국교회지도자들은 분단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남북분단을 고착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기독교계의 분단이데올로기는 해방 이전에도 있었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의 통일문제와 민족문제가 관심 밖에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민족의 요구이며, 염원인 평화적인 민족통일에 응답해야 한다.

송기득 교수는 자신의 저서 <끝내 사람이고자>(1990년, 큰밭 기독교 학술연구회)에서 “통일의 당위성은 비단 한겨레가 하나가 되어, 함께 살자는 민족통일 염원에만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남쪽과 북쪽의 갈라짐이 오는 여러 가지 모순이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에 그 분단모순을 극복하자는데 그 뜻이 있다”면서, “남쪽과 북쪽이 갈라진 상태에서 잘 살수 있다면, 굳이 하나가 되어 살아야 할 까닭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서로 갈림으로 해서 우리 겨레가 안팎으로 잘 살 수 없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남과 북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으면서, 어떻게 우리가 잘 살 수 있겠는가”라고 남북분단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송 교수는 이것을 비인간화라고 규정지었다. 그리고 분단의 모순이라고 했다. 이것은 결국 가진 자와 못가진자, 있는 자와 없는 자, 힘 있는 자와 없는 자 간의 계층 간의 갈등을 일으키고, 남과 북이 갈라진데서 생긴 계급모순이다. 한마디로 남과 북이 하나 될 때, 분단모순도, 계급모순도 극복 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남과 북이 하나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해서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교회의 한 모퉁이에서는 아직도 통일의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인식하며,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통일문제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북한의 무신론과 통일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조차도 곱지 않은 시선이다. 일부 교단과 교회는 통일운동에 앞장서는 목회자 및 평신도들을 매도하기에 바쁘다. 심지어 ‘빨갱이 목사’로 매도한다. 이 같은 매도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지닌 화해의 참뜻을 망각한 것이다.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