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태영 목사

소돔과 고모라 성이 죄악의 범람으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는 것이냐며, 심판을 면해 줄 것을 간청한다. 아브라함은 50인으로부터 시작하여 45인, 40인, 30인, 20인까지 내려가다가 마지막 10인에 이르러서 “노하지 마소서 이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라고 청원한다. 그럼에도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 사람이 없어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의인 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무죄한 사람 열 사람으로 보기에는 심판의 사유가 납득되지 않는다. 아무리 악한 세상이라도 어린아이, 노약자, 부녀자 등 선량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때문에 ‘의인 열 사람’은 죄 없는 사람 열이 아닌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 있는 양심으로, 자기 몸을 내던져 악에 저항한 사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소돔 고모라는 죄악이 범람하는 데도 맞서 싸운 이들이 없었던 것이다. 적이 공격해오는 데도 적과 맞서 싸우는 사람이 없다면 그런 나라는 적의 손에 들어가는 것이 예약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향한 “이번만 더”는 서술이 아니라 탄원이다. 구약학자 델리취는 이 탄원을 “참된 기도의 본질”이라고 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거리를 이어주며, 끈질기게 호소하고, 그 호소가 이뤄질 때까지 끊이지 않는 ‘신앙의 파렴치성'" 이라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파렴치하지 않을 수 없다. 시쳇말로 하나님 앞에서는 자존심 버리고 오직 자비를 빌어야 한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파멸하지 않기 위해서다. 내 힘으로는 악의 끈질김, 사악함을 이길 수 없다. 악이 강해서라기보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너무도 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고 하셨다. 우리가 죄악의 결과로 끔찍한 재난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파렴치해야 한다. 오늘의 남과 북의 현실이 그러하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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