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탁 기 목사

5백년전에 일어난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제 한국교회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이제까지 한국교회는 신을 교회당 안에 가두어 놓고, 신을 자신의 입맛대로 이용하지 않았는가. 목회자와 교인들은 신학이니, 교회니 하는 인간학적인 것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교적이라고 말하는 재고품들을 쌓아 놓고, 신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없애 버렸다. 예수님은 “마음을 비우라” 했다. 그리고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라(회개)고 했다. 그것은 신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라는 말로 해석된다.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기념행사를 가졌다. 이러한 기념행사는 한마디로 이벤트성에 불과했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종교개혁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디에서도 종교개혁의 모습은 보이지를 않았다. 부자교회 담임목사의 세습은 여전히 진행되었고, 목회자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은 끝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을 감추기라도 하듯 이들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마음껏 이용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라고 했다.

예수님은 돌아가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더불어 산다’와 ‘더불어 수난 당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것이다. ‘더불어 수난 당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결부되어 있다. 본회퍼는 감옥 안에서 무신론자들과 더불어 살다가 더불어 수난당해 교수형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땅에서 종교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 특히 서구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종교개혁에 우리도 여기에 속한 공동체의 역사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서구의 종교개혁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구의 종교개혁을 귀감으로 삼아 신의 자리를 맘몬으로 빼앗아버린 한국교회, 바벨문화에 길들여진 한국교회, 군사문화에 길들여져 군비경쟁을 부추기는 한국교회, 성육신 하신 주님의 기쁨, 다가올 기쁨을 거부하는 한국교회, 타락한 중세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한국교회, 선교초기부터 정교분리를 내세워 권력주변에서 온갖 혜택을 누린 한국교회,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몰각하고, 민족의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지 못한 한국교회, 민족운동과 항일운동, 그리고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있어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한 한국교회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그것은 500년 전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을 비롯한 그 후 계속해서 일어난 종교개혁이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려고 한 ‘교황의 수장권’ 문제, 교황만이 성서를 바르게 해석 할 수 있다는 ‘교황무오설’, 예수께서 제정해 주신 두 개의 성례전만을 인정하고 가톨릭교회가 임의적으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던 5개의 성례전, 이것은 성서에 기초하지 않은 것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하며,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초대교회의 의회주의 파괴를 공격했다.

루터가 이렇게 성서와 공의회 위에 군림하는 교황, 그리스도 대신 수장권을 주장하는 교황을 비판함으로써, 교회의 치리나, 교리, 제도의 규정은 성서로 환원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교회의 제도를 비롯한 규정, 치리가 성서로부터만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한국교회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말하면서, 여기에 충실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종교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있어도, 그에 대한 실천은 없다. 그래서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 역시 공허하다. 신을 자신의 자리로 돌려줄 기미가 보이지를 않는다. 맘몬과 바벨의 노래 소리만 들린다. 모두가 우두머리가 되겠다고 분열과 갈등을 일삼는다. 교회의 분열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목소리는 묘연하다. 한국교회에서의 진정한 종교개혁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 한반도의 평화와 분단극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스도의교회협 증경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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