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구약성경 예레미야서는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소명 받는 장면을 특별히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소명 받아 산다는 게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육신이 고달함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 그가 편히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피하는 게 정상이다. 예레미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피하려고 갖가지 핑계를 댈 때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들리는 소리는 준엄했다. “내가 너를 태아가 되기도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어나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라로 세웠노라.”(렘 1:5) 그러니 어쩌겠는가. 꼼짝없이 붙들릴 수밖에. 아무리 시대가 흘렀어도 예언자로서 설교를 하기는 어렵다.

1967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행한 ‘베트남 넘어’라는 설교도 마찬가지다. 당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베트남의 팃낙한 스님을 포함한 세계의 많은 선각자들로부터 ‘당신은 왜 흑인 인권운동을 하면서 베트남의 비극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느냐?’는 호소와 요청을 계속 듣고 있었다. 하지만 나라가 하는 전쟁을 반대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불러 맡기시려는 사명은 가장 어려운 사명입니다. 우리 내면으로부터 오는 내적 진실의 요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속한 나라의 정부정책을 반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나 전시에는 더욱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제 침묵은 곧 배신이 되는 때가 왔고, 그래서 매국노로 지탄받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반전과 평화를 외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그러고는 애국을 가장한 전쟁 옹호론자의 비난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설교한다.

“정말 그들은 복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말입니까? 복음은 공산주의자, 그들의 아이와 우리의 아이, 흑인과 백인,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이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저의 사역이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분에게 복종하기 위한 사역이요, 그 원수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그들을 완전히 사랑한 그분에게 복종하는 사역임을 모른단 말입니까? 바로 그분의 충실한 사역자로서 제가 베트콩과 카스트로와 마오쩌둥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제가 그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해야 합니까? 무릇 제 생명을 그들과 나누겠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약한 자들을 위해서 말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자들, 희생자들을 위해서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가 원수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부름 받았습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어떤 문서도 이 모든 사람을 결코 우리의 형제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양권석/성공회대/‘종교개혁 500주년과 한국교회의 과제’/기독교사상, 2017. 11호에서 인용) 과연 오늘날 한국교회의 그 많은 설교자 가운데 북한을 염두에 두고 한국교회를 향해 마틴 루터 킹 목사처럼 설교를 할 수 있을까?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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