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전북 김제의 대지주 조덕삼 씨와의 일화는 유명하다. 이 목사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떠돌이생활을 했는데 그를 불쌍히 여기고 집에 머슴 겸 마부로 받아들인 이가 조씨였다. 조씨는 어깨너머로 한글과 한자를 공부하는 그를 눈여겨봤고 자신의 아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게 했다. 두 사람 사이가 끈끈해진 것은 미국 남장로교 최의덕(Lewis Boyd Tate) 선교사를 만나 함께 예수를 영접하면서다. 1902년 ‘ㄱ’자 교회 금산교회를 짓고 그해 가을 동시에 세례와 집사 직분을 받았다.

1907년 장로 1명을 투표로 선출할 때 교회 설립자인 조 씨를 제치고 마부 출신인 이 목사가 장로로 선출됐다. 조씨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고, 집사의 직분으로 잘 섬겼다. 신분차별이 심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조씨의 태도는 예사롭지 않은 신앙 결단이었다.

조 집사는 이 장로의 믿음을 귀히 여겨 평양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했고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전액 부담했다. 5년 뒤 그를 자신이 장로가 돼 섬기던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대지주가 자기 집안의 머슴이던 이 목사를 섬긴 것이다.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이 목사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큰 바위 얼굴’로 통한다. 20여개 교회를 설립하고 세 차례나 장로교단 총회장을 지냈으면서도 명예나 권력, 재물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큰 교회의 청빙을 거절하고 작은 농촌교회를 끝까지 지켰다.

일제강점기엔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끝내 거부했다. 1942년 장로교 총회를 재건한 그의 행정능력에 깊은 감명을 받은 함태영 부통령이 장관 입각을 제안했지만 역시 거절했다. “지금까지 목회자로 살았으니 앞으로도 목사로 종신 하겠다”는 게 대답이었다고 한다.

이 목사는 70세 고령에도 장로회 대전신학교를 설립 하였다. 또한 교계 ‘법통’으로도 불렸다. 교계정치 흥정에 흔들림이 없었으며, 현행 장로교 총회의 헌법은 1953년 그의 손에 의해 전면개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한국교회 개혁과 회복운동 머슴 목회자 이자익(1879∼1959) 총회장 리더십 포럼’이 열게 된 이유를 “그가 진실하고 겸손한 목회자”였기 때문”이라고 한다.(출처 : 미션라이프. 2017-11-03)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하여 기도의 함성과 종교개혁에 관한 학회 등의 모임이 곳곳에서 개최되지만, 종북, 공산당 등의 외침도 있다. 그러나 자기와 정치적인 성향이 다르다고 해서 그러한 덧씌움의 외침이 면죄부는 아니다. 중세 가톨릭교회보다 더 부패했다는 지탄을 받기에 외식을 버리고 개혁을 해야 한다 하면서도, 우리가 종북 공산당 등의 외침으로 덮으려는 순간 교회의 개혁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개혁을 해야 할까하는 숙고(熟考) 속에, 위 보도내용에서도 몇 가지 모범사례를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조덕삼’ 장로는 머슴이었던 ‘이자익’ 목사를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 겸손한 섬김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둘째. 일제강점기엔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 애국과 신앙의 정절을 보여주었다. 셋째. 20여개 교회를 설립, 세 차례나 장로교단 총회장 역임, 명예나 권력, 재물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 참 지도자 상을 보여주었다. 넷째. 큰 교회의 청빙을 거절, 작은 농촌교회를 끝까지 지켰다. = 진실한 목회자 상을 보여주었다. 다섯째. 함태영 부통령이 장관 입각을 제안했지만 역시 거절했다. = 정교유착의 단절을 보여주었다. 여섯째. 교계 ‘법통’으로도 불렸다. 교계정치 흥정에 흔들림이 없었으며, 현행 장로교 총회의 헌법은 1953년 그의 손에 의해 전면개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좋은 것이 좋은 것. 은혜로 하자. 등으로 포장하려는 불의, 부패와는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23:28).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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