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제5장 루터의 95개 조항

비텐베르그 성벽교회 출입문에 내건 95개 조항을 보면,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할 만큼 과격한 내용이란 별로 없다. 로마가톨릭 교단 내부에는 다양한 그룹들이 있었고, 서로 다른 주장들을 놓고서 논쟁을 하곤 했었다. 탁발수도회나 프란시스코 종단에서는 이상주의적인 종말관을 갖고 있었다. 도미니크파와 어거스틴 수도회는 매우 대립되는 입장이었다. 반체제적인 수도사들은 일반 사제들에 비교해 보면, 훨씬 과격하고 위험한 선언을 하였다. 어거스틴파 수도사 루터가 95개 조항에서 주장하는 것들은 그리 엄청나게 새로운 신학사상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중세시대 말기에 유럽에서 면죄부 판매는 상당히 오래된 관행이었고, 그것을 반대한 사람도 루터가 처음은 아니었다. 교황 클레멘트 6세가 1343년에 면죄부 제도를 공포하였다. 경건한 기독교인이 일종의 감사헌금 하도록 제도화한 것이다. 이런 것들이 합당한 조건들에 부합하면 무료로 면죄부를 배포할 수도 있었다. 1476년 페라우디(Raimund Peraudi)가 면죄부의 활용을 확대 해석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 그래 아마도 연옥에 머물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영혼들에게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한 것이다.

면죄부 판매에 반론을 제기한 신학자들이 많았다. 독일에서 경건운동을 주도한 베젤의 요한, 갠스포르트가 면죄부의 오용을 논박했고, 매우 존경을 받았다. 츠빙글리의 스승이자 바젤대학교의 교수이던 토마스 비텐바흐 역시 면죄부를 거부했다. 1515년 이후로는 많은 신학자들이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독일 삭소니에는 새로운 군주가 들어섰고, 루터에게는 평신도 후원자들이 호응하고 동조하게 되면서 그 이전과는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담대하고 힘차게 설교하는 루터는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즉각적인 논박과 대응을 주저하지 않았고, 출판을 통해서 자신의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였다. 95개 조항은 일부나마 기독교의 가르침을 회복시켰고, 인류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를 제공했다. 루터는 진정한 회개를 호소하면서, 면죄부의 허상을 고발하고 비판했다. 양심의 호소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로마가톨릭교회가 자랑하던 교황의 권세가 무너지는 단초가 되었다.

제6장 종교개혁의 횃불들

종교개혁의 성패를 좌우하는 영적 전쟁은 몇 차례의 토론회와 논쟁들을 통과해 나가는 과정에서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종교개혁의 주장들을 발본색원하지 못하게 되었고, 마침내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으며, 개혁자들에게는 승리의 확신이 주어지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격렬한 전투는 로마 교황청과 루터 사이에서 1517년부터 1521년까지 증폭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 기간에 교황 레오는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 정치의 조율사로서 엄청나게 복잡했기 때문에, 루터의 문제는 독일에 있는 어거스틴파 수도사들이 회합을 갖고 이처럼 귀찮은 문제들을 처리하도록 조치를 했다. 레오는 조카 로렌지노 메지치와의 사이에 탐욕스러운 정복전쟁을 치러서 우루비노를 점령했고, 이집트와 시리아의 몰락으로 투르크 족들이 키프러스를 점령하자 십자군 전쟁을 계획하였다. 프랑스와 베네치아는 스페인에 보복하려는 일들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점차 루터에 대항하는 로마가톨릭의 충성파들과 기득권자들의 탄압이 나타났다. 인골슈타트대학교 교수 요한네스 에크가 탄핵을 주장하면서 루터와의 논쟁에 뛰어들었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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