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종 문 목사

한국에서의 기독교선교의 핵심적 동기는 다른 선교지에서와 마찬가지로 복음전파라는 사명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복음선교가 서양문명의 전파라는 동기, 활동과 처음부터 불가분의 관계되어 었었다는 사실을 몰각했다. 처음 한국에 들어온 감리교 선교사나, 장로교 선교사들은, 순수한 복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들은 서양문화의 전령자들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한국사람 모두가 암흑 속에 살고 있었다”고 본국 선교부에 보고했다. 선교사들의 ‘암흑’이라는 관찰은 기독교를 모르는 한국민족에게 온 것이 아니라, 문화적 삶의 영역을 판정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문화적 암흑은 서양문화에 의한 관찰의 결과이다.

그린피스의 ‘은둔자의 나라’라는 표현 역시 문화적 평가를 포함하고 있다. 그는 1882년 <은둔자의 나라, 코리아>라는 책을 펴냈다. 그 이후 서양인들,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한국을 ‘은둔자의 나라’로 일컬어지기 시작했다. 은둔자의 나라라는 규정은 한국의 폐쇄성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서양의 팽창주의로부터의 규정이라는 것이다. 당시 몇몇 선교사들은 이를 의식하며, 비판했다. 이 말은 1880년 이전까지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마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헐버트는 한일간의 을사조약을 계기로 해, 한국에 대한 외세들의 압력을 인식하게 되면서, 한국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헐버트는 “외국 종교가 정치적 음모를 위한 가면에 불과하다는 두려움이 퍼지기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일본이나, 중국 이상의 은둔의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은둔국이란 말은 서양자본주의 시장개척의 팽창주의를 반영한 것이다. 그것은 영미 선교사들 중 일부가 한국을 장사꾼들의 소굴로 만든데서 쉽게 알 수 있다. 알렌은 수명을 당한 이씨 왕조로부터 서울 전기시설과 전차길, 상하수도 공사, 운산금광 운영권을 얻어 냈다. 언더우드 역시 한국인을 상대로 농기계 장사를 했다.

1866년 3월과 5월 부산과 평양서 미국 배가 파선됐다. 당시 한국인들은 미국인들을 후대했다. 그럼에도 미국인들은 “한국인들은 거대하며, 그들의 힘은 헤라크레스에 비할 만하고, 그들의 사나움은 호랑이 보다 좀 못하다고나 할까 하다”고 했다.

그런데 1866년 7월 한국에 온 제니널 셔먼호는 총기화약, 금지품 등을 싣고 들어왔다. 그러한 것들은 한국인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외세에 대한 한국방어는 깨질 수밖에 없었다.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이루어졌다. 그리피스의 그 외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을 위하여 특별한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외교가 한국을 개방하도록 했으며, 한국을 세계시장에로 유인했고, 현재적 차관, 사회, 정치적 질병, 무질서를 이끌어들였으니,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신으로부터 받아온 축복으로서 먼저 한국을 치유하고 축복해주어야 한다”

우리 속담에 ‘병 주고 약준다’는 말이 있다. 미국인이 받은 신적 축복이란 인디언들을 멸족시키면서 빼앗은 풍요한 자원과 땅이 아닌가. 그 축복은 처음부터 지배자의 것이었다. 이러한 음모를 한국기독교는 몰랐다.

예장 통합피어선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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