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종 문 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태복음 18-25절)

12월은 성탄의 계절이다. 외국에서는 성탄절의 축제가 무르 익어가고 있다. 예수님의 생일이 세계적인 명절이며, 축제의 날인 것은 분명하다. 그만큼 그리스도교가 세계로 번져 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기독교가 세계인의 종교가 되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평화와 사랑, 그리고 정의의 종교인 그리스도교가 세계 속에 뿌리를 내렸음에도, 세계의 곳곳에서는 전쟁과 갈등, 기아, 살인, 폭력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다. 정의는 실종되고, 인류의 평화는 묘연하기만 하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간구해야 할 교회는 팍스를 말하며, 전쟁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여기에다 성탄절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 가정과 자기중심적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성탄절은 술과 환락 속에서 자기본능을 발산하는 명절로 착각하고 있다. 기독교인들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휘황찬란한 십자가 탑의 불빛과 거리의 네온은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의 자본주의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어두운 밤에 동네주민들의 등대가 되었던 교회의 십자가탑의 불빛은 빛을 잃어 버렸다. 오히려 전기로 예수님을 고문하는 것처럼 비쳐지고 있다.

또한 시멘트 속에 갇혀 슬프게 우는 ‘성전 예수’, ‘금관의 예수’를 연상케 한다. 다윗문화에 길들여진 오늘 한국교회는 호화로운 교회당에 예수님을 가두어 버렸다. 그렇다보니 신은 맘몬에 갇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오늘 국민들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에 교회가 없기 때문이다.
민심을 이반한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아기 예수의 탄생은 불의한 통치자에 대한 거부를 뜻하며, 억압과 불의에 대한 항거를 뜻한다. 또한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를 주러 오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12월 한 달 동안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분단의 현장에서 평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가 세계평화를 담보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예장 통합피어선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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