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헌철 목사

존 후스는 보헤미아의 후센니츠라는 마을에서 1380년 경에 태어난 후스는 위클리프의 교리를 강력하게 수호했고 대주교의 칙령을 거부했다. 이 사건이 교황에게 알려졌고 교황은 콜로나 추기경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존 후스를 로마법정에 직접 출두시켜서 그가 거짓과 이단을 설교했다고 고소하고, 후스로 하여금 그러한 고소에 대해 변호하게 했다. 

1414년 11월 독일 콘스탄스에서 전체 위원회가 소집되었는데, 이 위원회는 개혁의 진행을 짓밟고자 하는 것이었다. 존 후스는 이 위원회에 출두하도록 소환되었다. 큰 환호성과 함께 각 도시에 안내되었으며, 일종의 승리감 속에서 독일을 통과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추방 자였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나의 최악의 친구들이 보헤미아에 있음을 안다.” 후스가 콘스탄스에 도착하자마자, 후스가 그 시에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그는 곧 체포되어 궁정 관리에게 넘겨졌다. 그가 위원회 앞에 섰을 때 그에게 고소된 조항들이 낭독되었는데, 40개 이상이나 되는 그 조항들은 주로 그의 저술들에서 발췌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존 후스가 경건하고 분명한 표정으로 이 답을 했을 때, 전체 위원회는 그를 조롱하고 비웃었으며, 위원회에서 지정한 주교들이 그의 성직자 복을 벗기고 그를 모욕하며 “종이 주교관”을 그의 머리에 씌웠다. 거기에는 “마귀들”이 그려져 있었고 “이단들의 주동자”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여 가시관을 쓰셨다. 그렇다면 비록 굴욕적이긴 하나 그를 위하여 내가 이 가벼운 관을 쓰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한가? 진정으로 나는 기꺼이 이것을 쓰겠다.”라고 했다. 그의 머리에 이것이 씌워졌을 때 주교는 말하기를 “이제 우리는 너의 혼을 마귀에게 넘겨 주노라.”고 했다. 그러자 존 후스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서 “그러나, 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주께서 대속하신 나의 영을 주의 손에 의탁하나이다.”라고 말했다. 화형대의 사슬에 묶였을 때에도, 그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여 이보다 더 심한 사슬에 묶이셨는데 내가 왜 이 녹슨 사슬을 부끄러워 하리요?”라고 했다. 장작이 그의 목까지 쌓였을 때 ‘바바리아’ 공작은 그에게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라고 했다. 그러나 후스는 대답하기를 “나는 결코 악을 지향하는 교리를 설교한 적은 없다. 내가 내 입으로 가르쳤던 것을 이제는 나의 피로 인 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사형집행인에게 말했다. “당신은 거위 한 마리를 불사르려 하고 있다(보헤미아어로 후스(Huss)는 거위를 나타낸다). 그러나 1세기 후에는 구울 수도 삶을 수도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고 했으며, 불은 나무에 붙었고 순교자 후스는 크고 쾌활한 소리로 찬송을 불렀다. 사람들은 그의 재를 모두 모아서 라인 강에 뿌렸고, 지상에 그의 흔적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 후부터 개혁의 불 꼿은 더욱 거세지기 시작 하였으며, 그 후 약 100년 이 지나 ‘마틴 루터’는 95개조의 논제로 개혁을 외쳤던 것이다.

우리는 교황은 물로 교회와 성직자들의 썩은 신앙의 부패를 강력히 외치며 개혁의 깃발을 들은 ‘후스’를 칭송한다. 그러나 과연 진정성이 있는가? 작금에 스스로의 부패를 돌아보자고하면, 교황주의 자들과 같은 검을 휘드르지는 않는지? 아니 부와 성공을 위해 아부, 외식, 박수 속에 묻혀 자신을 감추고 있지는 않은가? 반문해 보자! “과연 종교지도자로써 한국사 앞에서 추하지 않았는가? 또한 교회 앞에 위선의 창고는 아니었는가?” 따라서 “성경의 증거, 곧 하나님의 뜻”대로 믿는 성도의 삶을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박해진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