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로 예수 성탄 전 4주간을 말한다. 영어로 대림절을 뜻하는 ‘Advent’는 ‘오다’라는 의미인 라틴어 ‘Adventus’에 기원을 두고 있다. 대림절이 언제부터 지켜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3~4세기 무렵, 지금의 프랑스인 갈리아와 스페인 지역에서 성탄절을 앞둔 3~6주 동안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고행과 금식을 실천하는 관례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대림절이 교회 안에서 공식적인 절기로 인정된 초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희망과 기쁨 속에서 기다리는 기간이었으나, 중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인간을 위한 심판의 날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공포와 속죄를 위한 절기로 간주되기도 했다. 종교 개혁 이후, 근대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재림을 기리는 기쁨의 절기라는 본래의 의미를 회복했다.

대림절의 근본정신은 나를 비우는 것이다. 주님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버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본받자는 의미이다. 그런데 과연 주님을 대림하는 절기에 욕심을 내려놓고 나를 비우는 절제를 실천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올해 우리 사회에서 유행처럼 번진 단어가 하나가 있다. “갑질”이다. 인간관계를 ‘갑’‘을’ 관계로 설정하고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사람들을 향해 벌인 갖가지 횡포가 세상을 분노케 했다. 재벌회장이 운전기사에게 욕설을 쏟아붓고, 부잣집 사모님이 백화점 여직원을 무릎 꿇리는 이런 몰상식한 행동들은 사회적인 공분을 자아내면서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런 갑질을 어느덧 한국교회가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 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크고 시설 좋은 교회는 작고 가난한 교회 교인들을 마구잡이로 끌어온다. 요즘 전도는 불신자를 대상으로 하기보다 옆 교회 교인들을 빼가는 데 집중되고 있다. 주변 교회에서 작은 분란이라도 일어나면 요 때다 하고 교회 문을 활짝 열고 한꺼번에 끌어간다. 이단들의 주특기를 대형교회들이 벤치마킹하고 있는 셈이다.

대 교단들의 ‘갑질’도 정도를 넘었다. 군소교단들을 우습게 여겨 마음대로 한국교계를 휘젓는다. 내가 가면 길이 아니어도 길이 된다는 식이다. 내가 주도해야 하고 내가 설 자리가 없으면 가차없이 기존 단체를 없애고 새 단체를 만든다. 한마디로 유아독존이다.

이런 사람들이 소위 한국교회 지도자라며 목을 곧추 세우고 다니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한국교회가 손가락질 당하고 조롱거리가 된지 오래지만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점점 더 증세가 심해진다. 이게 다 학습효과 때문이다. 어릴 때 가정 폭력을 보고 자란 아이가 성장해 자신도 모르게 똑같은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세상에 본이 되어야 할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과거 교회 분열에 앞장서온 대 교단의 원죄를 고스란히 이어받으면서도 한줌 부끄러움조차 없다.

주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그 당시에도 ‘갑질’을 일삼던 자들이 있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모두 당시 특권계층이었다.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서 떵떵거리며 살던 지도자들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높임을 받는 것을 즐겼다. 그러니 아무리 머리로 성경을 달달 외워도 선지자들의 예언을 믿지 않았고, 나사렛에서 자란 청년 예수가 하는 말을 비웃었을 것이다.

결국 ‘갑질’은 내가 가진 것을 남을 위해 절대로 내려놓을 수 없는 탐욕의 뿌리에서 태어난 기형아인 셈이다. 한국교회 대 교단의 총회장들, 일부 대형 교회 목사들은 자기가 대단한 줄 안다. 내가 최고라는 자고함이 흐르고 넘쳐 ‘갑질’이 ‘갑질’인 줄도 모르는 무지로 꽉 차 있다. 이런 자들을 심판하러 주님이 오셨다는 것을 그들은 이번 대림절에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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