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한국신문
해설
“고난당하는 이웃과 함께 할 때 교회는 성장했다”한국교회 성장의 길(1) … 한민족과 고난의 길을 같이 갈 때 가능
유달상 기자  |  yds12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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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11  09: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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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의 역사 왜곡

한국교회의 역사 왜곡은 그 어느 종교단체보다도 심각하다. 한국교회가 아니 한국기독교가 역사를 왜곡하지 않았다면, 민족분단의 중심에 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늘 한국기독교는 민족구원이 마치 앵글로색슨족의 선교의 계기가 된 것처럼 호도한다. 또한 마치 앵글로색슨족의 선물인 것처럼 말한다.

그렇다면 앵글로색슨족 선교사들은 이 민족이 선교를 되찾는 민족의 사명을 마비시키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는 한민족이 처한 위기에서 하나님의 ‘영의 임재’를 고백할 수 있다. 영국과 미국의 위기들이란 한민족의 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영미의 선교사들은. 아니 지배이데올로기 신학을 한국교회에 전해준 선교사들은 영미의 상황을 한민족의 상황과 동일하게 생각했다는 것은, 한민족의 선교와 기독교역사를 왜곡하게 했다.

감리교 선교사 저딘은 “한국의 이 민족적 위기에 있어서, 이러한 동양 선교지들에서의 하나의 희망을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 즉 백성의 생각을 그에게로 향하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그의 지배에 복종하게 하는 그의 능력과 권위의 한 민족적 현현이다. 이것은 ‘앵글로색슨족에 대한 영적 축복인 강력한 신적 임재’요, ‘모든 민족에게로의 그의 은혜의 역사를 확대함에 있어서 지도하도록 준비된, 모든 나라들에 있어서의 이 민족의 대표들(앵글로색슨족의 대표들인 선교사들)의 사명이다”는 잘못된 민족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저딘의 말대로라면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선교사들에게서 배워야 했다. 그렇다 해도 한민족은, 민족의 열망에서의 구원을 절규하고, 통회하는 부흥운동은 앵글로색슨족 선교사들의 주도권에 속하지 않았다. 앵글로색슨족 선교사들이 한국기독교에 있어서 부흥운동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승인했었다면, 한국기독교의 독자적인 선교의 틀을 아련하게 하는 계기를 가져다가 주었을 것이라는 것이 박순경 박사의 주장이다.

서양세력에 굴복한 한국인들은, 기독교가 서양나라들의 종교라고 서양과 동일화시키고서 서양을 흠모했다. 서양을 모든 것의 모델로 생각했다. 그것은 영미의 식민지신학에 익숙해진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생각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서양의 음모를 몰랐던 것이다. 이 오류가 오늘 한국기독교가 민족의 문제로부터 이탈하게 하는 시초가 되었다.

그럼에도 여러 차례에 걸친 부흥운동은 한국교회 성장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선교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세계적인 주목과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교회성장의 원형이 되었다. 구한말 열강들의 침략과 일본 식민지세력의 등장은 한민족의 구원에 대한 열망을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만들었다.

한국교회는 1884년부터 1904년까지 교인수가 점차로 증가해 1905년도에 5만명, 1909년도에는 50만명으로 급성장했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100만명 구령운동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교회로 몰려와, 이들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비롯한 교육사업, 사회사업에 헌신한 영향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국교회가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을 때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11년부터 1919년까지 일본식민지세력과 영미 팽창주의가 합작하면서, 선교사들의 기독교의 정치참여를 철저하게 막았다. 그 결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했다. 그러나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한국교회는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한국기독교가 영미선교사들과는 상관없이 민족의 위기 앞에서 의식적인 활동을 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한국국민들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의 구원을 갈망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선교사들은 ‘정교분리원칙’을 내세워 기독교인의 정치에 관여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막았으며,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3.1만세운동에 참여한 한국인들을 ‘폭도’로 매도해, 선교부에 보고했다. 그럼에도 작게나마 민족 속에 민족의식이 살아남아 3.1운동과 같은 거대한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계기를 교회가 제공했다. 그러나 3.1만세운동의 현장에 자칭 민족지도자 33인은 없었다, 3.1만세운동의 중심에는 민족의 어머니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증언한 기독여성과 밭을 갈아 가족들을 먹여 살린 기독농민, 기독학생, 떠돌이들이 있었다.

   
 
기독교회 서양문화와 동일화

3.1만세운동 이후, 거리를 배회하던 떠돌이와 걸인, 농상공업자, 소작인, 가난한 농민들이 교회로 몰려왔을 때 교회가 크게 성장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기독농민과 소작인들은, 소작쟁위 등을 일으켜 일본인들과 갈등을 일으켰으며, 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역시 노동쟁위로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고 했다. 이러한 소작쟁위나, 노동쟁위는 교회를 성장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국기독교가 먼저 농촌에 교회를 세우고, 농민들을 전도한 것은, 선교사들의 종합선교정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일본식민지세력과 미국팽창주의에 길들여지면서, 국내에서 일어난 새로운 사상운동에 대응할 힘이 없었다. 이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오직 구원, 예수 믿고 천당 가라고 외쳤다. 또한 이 때 남산에 신사가 세워졌고, 교회는 전도한 교인의 2배 이상이 교회를 떠났다. 그것은 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민족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이의가 없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해방 후 크게 성장했다. 거기에는 민족해방을 미국이 가져다가 주었다는 국민적인 생각이 크게 작용했다. 한민족과 교회는 스스로 해방과 광복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또 다른 세력이 이 땅에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몰각했다. 오늘 한국교회는 교인수가 1300만명에 이른다고 말한다. 그것은 놀라운 교회성장이며, 세계교회의 호기심과 이목을 끌고 있다.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였던 아서 브라운 박사는 자신의 저서 <극동의 지배>에서 “한국민의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다. 그리고 한국민의 선교사들에 대한 호의는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식민지 국민으로서, 피압박민족으로서 한민족은 새로운 세계, 새로운 나라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선진국인 유럽과 미국의 선교사들이 가져다준 기독교가 새로운 나라를 열어 줄 구원의 종교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나라를 갈망했던 피압박민족에게 있어 기독교는 한마디로 희망이었으며, 많은 지식인과 밑바닥 생활을 하던 농민, 상공인, 떠돌이들이 교회로 몰려오게 했다. 특히 8.15해방과 6.25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 땅의 국민들은 해방과 6.25 전쟁의 승리를 가져다가 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에 대해 감사함을 가졌다. 일본의 패망이 또 다른 세력인 미국과 소련의 음모를 읽지를 못했다. 당시 제3의 지대를 강조했던 김구를 비롯한 이동휘, 김규식 등은 교회를 떠났다.

어찌됐든 기독교는 피압박민족, 6.25한국전쟁과 이 전쟁의 폐허 속에 있었던 대한한국 국민에게 희망을 가져다가는 주는 희망의 종교였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기대어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종교였다. 이 민족에게 있어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이들이 교회로 몰려 왔으며, 교회는 자연스럽게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종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한국교회가 성장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이와 함께 한국교회를 성장하게 한 또 하나의 계기는 네비어스 방법에 위한 한국교회 자립, 자립치리였다. 그럼에도 자립경제는 어느 정도 실천되었던 반면, 치리권은 선교사들에게 의존되어 있었다. 이 문제는 선교사들과 한국기독교에 의해서 철저하게 반성되지 못하였다. 선교사들은 네비어스 방법에 의한 교회성장을 부정했다. 분명 한국교회의 성장은 순수복음 선교와 성경공부에 대한 강조, 근원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분명 한국교회는 세계교회가 놀랄 정도로 크게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1989년 한국의 기독교인은 전체국민의 25%에 해당하는 1200만명으로 놀랍게 성장했다.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성장 속도였다. 그렇다 한국교회는 가난한 민족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을 때 기독교 역사가 증명하듯이 크게 성장했다. 여기에는 은준관 목사가 “참 교회는 농촌교회이다”고 했듯이, 교회성장에 농촌교회의 역할이 컸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은 세계교회의 호기심과 이목을 집중시켰다.

부자들을 위한 교회로 변질

산업화 시대를 맞아 농촌에서 이주해온 기독교인들은 도시교회를 성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물론, 농촌에서 상경한 떠돌이들의 피난처는 교회였다. 그래서 90년대 교인들을 도시교회에 내어준 농촌교회는 자연스럽게 작아질 수밖에 없었으며, 도시교회는 대형화되기 시작했다. 오늘 일부에서 농촌 살리기 운동을 벌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한국교회가 1989년을 정점으로 해서 교회성장은 멈추고 교인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70-80년대 세워진 교회들 중 문을 닫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부자들을 위한 교회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알렌은 “한국교회가 교회성장의 척도를 ‘돈’인양 생각한다고 했다. 네비어스의 방법은 선교의 성장과 교회성장에 한 요인이었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알렌의 지적은 오늘 한교회의 상황에서 적중했다.

일본 제국주의 아래서 선교사 모펫의 한국교회의 저성장률에 대한 분석을 보면, “1911년부터 1919년까지의 교인수 감소현상은 기독교계의 식민회 민족운동이나, 그 외의 민족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에 기인했다. 민족문제에 대한 선교사들의 선교정책 즉 교회와 정치의 분리, 교회의 중립이라는 정책에 대한 한국인들의 실망이 작용했다”는 지적했다.

그렇다. 민족과 함께하지 않는 종교는 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님 ‘삶의 현장’의 주체였던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떠돌이, 장애인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멀리하는 종교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수 없다. 이것은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선교사역과 배치된다. 그러나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이후, 한국교회는 민족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부자들을 위한 교회로 변질된 한국교회는 다윗문화에 길들여진 나머지 신의 자리를 맘몬으로 대치하고, 예수님을 성전에 가두어 버렸다. 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바쁘다. 그 결과 교회 내에서 소외된 노동자와 떠돌이, 그리고 도시빈민들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고, 부자들로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한국교회는 한 일간지의 조사에 따른 한국기독교인의 수가 불교를 제치고 1위라는데 위안을 받고, 이 숫자를 최대한 이용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교회에 안착하지 못한 교인, 소외되는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고, 국민들은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 한국교회에 등을 돌이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맘몬과 바벨을 노래한 나머지, 세상이 교회를 버렸다. 이제 한국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세태가 되었다.

하비 콕스는 “교회가 세상을 버리면, 하나님은 교회를 버린다”고 했다. 이 말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라는 말로 들린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장애인, 병든자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있는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 곳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는 곳이며, 오늘도 아들과 딸을 차가운 바다 속에 수장시키고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세월호 가족 울부짖음이 있는 곳이다. 또한, 김정은 독재정권 아래서 신음하는 북한동포의 외침과 청소부의 외침, 지진으로 고통을 당하는 포항시민들의 외침, 공장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아픈 소리가 들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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