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2. 아우크스부르크 대화

아우구스부르크. 루터가 카예탄과 논쟁하던 곳이다. 또한 1530년 6월 25일 멜랑히톤이 작성한 루터파 신앙고백서를 카를 5세에게 제출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루터와 카예탄 (Thomas Cajetan)과의 토론이 벌어진 것은 1518년 10월 12일부터 18일까지다. 루터는 1518년 5월에 교황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한 죄목으로 고소되었다. 로마 교황을 공격하는 루터를 제압하려고, 교황청에서는 루터를 압송하여 로마로 데려오기를 원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 황제와 교황청이 서로 긴장관계여서, 함부로 정치적인 권세를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막시밀리언은 자신의 아들을 스페인의 통치자로 세우려 했고, 교황청에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교황청에서는 추기경 카예탄을 보내서 루터를 만나게 하였다. 마침 카예탄이 레오 10세의 십자군 전쟁 계획에 대한 탄원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 독일에서 개최된 제국의회에 참석하였다. 삭소니의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선출을 앞두고 있던 시점에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해결책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1519년 1월 12일, 황제 막스밀리언이 사망하고, 신성로마 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마치 루터가 제기한 문제점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아무런 결론이 매듭되지 않은 것처럼, 장래 정치적인 계략들이 난무했다. 루터의 보호자, 프레데렉은 황제 선출권을 갖고 있었다.

카예탄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철저히 신봉하는 자였다. 도미니크파 수도사이기도 했던 카예탄은 루터의 태도가 교회에 대한 불순종이며 무례하다고 판단했다. 카예탄은 교회의 위계질서를 강조했고, 루터는 교회에 충성한다는 의미를 설명했다. 교황의 독재와 전횡에 따라가는 것이 교회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불충성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유쾌하지 못한 공방을 주고받다가 끝이나버렸다.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은 루터는 지혜롭게 서둘러서 아우크스부르그를 떠나버렸다.

3. 라이프찌히 논쟁(Leipzig Debate)

비텐베르그와 경쟁 관계이 있던 라이프찌히 논쟁에서는 루터의 생애에서 가장 복합적으로 혼란스러운 시절이 다가왔다. 1519년 6월 27일부터 7월 15일까지, 라이프찌히에서 열린 논쟁에서는 루터에 대한 공격의 선봉에 칼쉬타트와 에크가 나왔다. 처음에는 비텐베르그의 동료 칼쉬타트가 루터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칼쉬타트가 너무나 과격하고, 특히 농민혁명에 동조하는 쪽으로 나가자 결별하게 되었다. 라이프찌히는 공작 게오르게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개신교 종교개혁이 성공할 것임을 토론회에서 직감하였다. 왜냐하면 루터가 시종일관 토론에서 좌중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학생들과 교수들로 구성된 청중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나면서, 결국 루터의 설득력이 힘을 얻어가고 있었다.

라이프찌히 논쟁에서 핵심은 교황의 수위권이었다. 그 본질은 성경에서 과연 로마 교황권을 지지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느냐였다. 에크가 주장한 교황의 수위권과 권위에 대해서 초기 11세기까지는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음을 루터가 논박했다. 교황의 수위권은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서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공격했다. 또 다른 잇슈는 성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성례 자체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부터 시행해 내려온 성찬의 기능에 대해서 거부한다고 주장했다. 차 교황권의 조치들에 대한 의문이 늘어만 갔다. 갈수록 더 낳은 의혹과 문제점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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