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복된 성탄절에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독자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기도드린다. 성탄절은 죄 많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 위해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나신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고 기뻐하는 절기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사는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지극하시 사랑을 기념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이 하늘 보좌를 보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겸손과 낮아짐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이 독생자 아들을 보내시면서까지 자신을 희생하셔서 나를 선택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내 자아와 욕망을 내버리고 가진 것을 나눠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종교인구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선교 130여 년만에 제1의 종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영향력은 꼴찌를 면치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일반 국민들로부터 부정적인 대명사가 되고 있다. 가장 많은 신자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장 신뢰를 받지 못하는 종교로 전락한 근본 이유는 자아도취이다. 나만 잘 믿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스스로 기독교를 고립무원의 섬으로 만들고 말았다.

올해 기독교계의 가장 큰 사회적 이슈는 종교인과세였다. 기독교 뿐 아니라 모든 종교의 성직자들이 받은 소득에 세금을 물리는 법이 지난 정부에서 2년간 유예기간을 거쳐 내면 1월1일부터 시행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보수 기독교계는 여러 가지 준비 부족을 이유로 2년간 더 유예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해 왔다.

현재 이 문제는 기재부와의 긴 줄다리기 끝에 종교인 사례비 부분에 대해서만 과세하는 것으로 최종 합의에 이르렀다. 그런데 목사들에게만 특혜를 준다는 사회적인 여론의 역풍을 맞으면서 국무총리가 다시 조정할 것을 기재부에 지시해 또다시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목사들은 세금을 못내거나 내더라도 조금 내겠다고 하고, 국민들은 이런 목사들의 태도를 파렴치하게 여기는 것이 작금의 사회적 분위기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과거 한국 기독교는 아주 작은 것도 이웃과 나누는 삶을 실천했다. 선교사들은 복음을 증거하며 동시에 토착화에도 온 힘을 쏟았다. 그것은 기독교가 서양 종교로서 이질감으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서 겉돌지 않도록 한 것이다. 나라와 민족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는 촛불처럼 자기를 태우는 희생으로 희망의 등불을 온 누리에 밝힌 것도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오늘날 기독교의 부흥 성장이 이 땅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역전이 되었다. 기독교가 세계사에 유례없는 부흥과 교세 확장을 이룬 것이 오늘날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독약이 되었다. 교회가 커질수록 사람들로부터 괴리되고 지금은 세상에 짓밟히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분명한 목적과 그 의미에 한국교회가 철저히 배치되는 행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지난 선교 1세기에 이룩한 부흥 성장은 분명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 뜨거운 복음의 열정으로 인해 신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교회가 커졌으나 그럴수록 복음의 본질에서 멀어지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반대 현상이 나타나게 됐다. 크고 많다고 하여 자랑하고 작고 적은 것을 업신여기는 갑질은 주님과 맘몬을 함께 섬긴 한국교회의 필연적 돌연변이나 다름없다.

사회는 한국교회가 벌이는 자선과 구제에 대해 더 이상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마음 한 구석 허전함을 달래려는 자아도취적 기부행위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2017년 다시 오실 않을 성탄절이 이런 자아에 대한 깊은 자성과 진정한 사회적 사랑 실천을 회복되는 절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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