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또 다른 잇슈는 성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성례 자체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부터 시행해 내려온 성찬의 기능에 대해서 거부한다고 주장했다. 에크가 루터를 짓밟고 핍박하면 할수록, 점차 교황권의 조치들에 대한 의문이 늘어만 갔다. 갈수록 더 낳은 의혹과 문제점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루터는 6월 29일 권위에 대해서 설교했다. 마태복음 16장 13-19절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위임한 천국의 열쇠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준 것이라고 풀이했다. 결코 그 권위를 로마 교황에게 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선포했다. 교회는 죄를 사면하는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지 선포할 뿐인데 목회적인 사역에 제한된다.

에크는 보헤미아의 후쓰와 같은 죄를 범하고 있다고 루터를 공격했다. 후스는 로마가톨릭이 성도 개인의 구원여부에 대해서 마음대로 선포할 수 없다고 맞서면서,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에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에크는 후스의 파문을 정당화 하면서, 로마 교회의 수위권을 옹호했다. 루터는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며, 초대교부들의 글과 성경이이를 증거하므로 에크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공격했다. 루터는 전혀 희망이 없는 로마 교황청에 대해서 신성모독을 범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에크는 루터가 교황의 수위권에 대해서만 공격하는데, 교회의 종교회의도 역시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어거스틴의 글을 인용하여 종교회의 역시 권위를 주장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루터는 후스가 남긴 것을 보면 대부분 로마가톨릭의 견해와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옹호했다. 이제 루터는 교황권을 거부하고, 종교회의의 결정도 비판했고, 권위의 최종 근거는 오직 성경이라고 하는 입장을 확고히 표명한 것이다. 루터의 입장들은 곧바로 여러 논문들 속에 보다 더 선명하게 담겨지게 되었다.

1520년 12월 초에 루터는 “교황의 교서”(Exsurge Domine)에 의거해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루터는 이 교서와 에크의 작품들과 여러 권의 교회법을 12월 10일, 비텐베르그대학 문 앞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4. 『독일귀족에게 보내는 편지』

용감하면서도 뛰어난 신학적 진보가 표출된 것은 앞에 언급한 논쟁들을 거치면서 다져진 결과물들이다. 종교개혁에서 다루어질 중요한 내용들은 루터가 남긴 위대한 신학논문들은 1520년에 쏟아져 나왔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의 결정적인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변화의 시점이 되었다. 라이프찌히 논쟁은 루터로 하여금 교회의 개혁을 확고하게 그려내도록 자극을 주었고, 문제점들을 명쾌하게 지적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독일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루터는 거룩한 종교에 속한 일과 세속적인 것과의 구분을 철폐할 것을 주장했다. 루터는 세속적인 정치인들이 나서서 교회를 위해서 일하라고 촉구했다. 종교적인 부르심은 고상하고 선한 것이라는 로마가톨릭의 이원론적 사고를 루터는 거부했다. 세속정치는 더러운 것이라는 생각은 비성경적인 것이요, 무식한 주장이다. 신발을 만드는 일이나, 대장간에서 일하는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해서 신부가 성당에서 하는 일보다 더 저급하다고 말할 수 없다.

만일 그대가 렘브란트와 같은 화가라고 한다면, 화폭에다가 거룩한 장면을 그려서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을 신앙적으로 만드는 것이란 과연 무엇이던가?

세례, 복음, 믿음이 아니던가?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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