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기원전 733년 수리아-에브라임 연합군이 밀려들자 유다는 발칵 뒤집혔다. 백성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여 숨을 곳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처럼 절박한 때, 제 목숨이나마 구명하고 싶은 유다 왕 아하스는 앗시리아에 도움을 청하려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사야는 승냥이를 막으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극구 말렸다. 그러면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직접 징조를 보여주실 것이라며,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고 한다.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인 험한 시대에, 비록 보호자 없이 처녀가 낳은 아이와 같은 처지일지라도, 외세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라는 말이다. 그러나 유약하기 이를 데 없는 아하스는 제 고집대로 앗시리아를 불러들여 잠시 시리아-에브라임 연합군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끝내 앗시리아의 종노릇을 해야 했다.

이사야는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는 백성들을 향해 내일의 꿈과 이상을 지닐 것을 독려하기를,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뛰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이라”(사 35:5-6)고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무릉도원과 같은 나라를 바란 게 아니다. 소경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절름발이가 사슴같이 뛰는 나라이다. 천대받는 이들이 기뻐하는 나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많은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도 소멸되지 않고, 생명이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은, 이사야처럼 고단한 삶을 희망으로 해석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속사회 역시 희망이 넘쳐난다. 마케팅 재료로 희망을 사용할 정도로 각종 이벤트에는 어김없이 희망이 등장한다. 하지만 삶의 진액을 고갈시키는 희망이다. 자기 최면에 걸려 현실의 고통을 회피케 하거나 요행을 바라는 희망이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희망은 하나님을 굳건히 믿는 희망이다. 고통스런 현실을 직면하되, 고통을 넘어서는 희망이다. 죄악으로 인한 절망을 구속과 창조의 역사로 바꾸는 희망이다. 그리하여 성경에서 말하는 희망은 고난을 창조의 에너지로 수렴하게 한다. 대림절은 이처럼 고난을 창조와 구속의 에너지로 수렴하는 희망 즉 임마누엘 신앙을 선포하는 절기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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