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으로 살아남기

숱한 날들을 눕지 못하고 앉아
흙빛몸뚱이로 세월을 지켜내고
여무진 모습으로 세월을 낚고 있다

이름도 없는 것이 재사도 아닌 것이
하늘이 준 겸손함과 삶의 의지 하나로
펑퍼짐한 자태로 한세상을 살아간다

거처와 용도가 변하여도 자릴 지켜
깨질지언정 굽히지 않으려는 자세로
때때로 꿈도 꾸고 노래도 부르며

장독대나 광 바닥이나 귀퉁이를 집 삼아
오늘도 저녁별 돋아오면 아낙처럼 일어나
귀를 쫑긋 거리며 잠용(潛龍)처럼 일어난다 
 

시집 『블랙홀에서 부는 바람』에서
*정연덕 ; 고대 교육대학원. 시문학상.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자문위원. 기독시인협회 자문위원

▲ 정 재 영 장로
랜섬은 시를 사물시, 관념시, 형이상시로 구분한다. 사물시는 대상을 보고 그 대상에 시인의 감성을 대입하여 표현하한다. 사물시는 이미지즘과 동일하다. 그 반대로 사상과 이념들을 말하는 시를 관념시라고 한다. 사물과 관념을 합일하여 새로운 작품을 형이상시라고 구분한다. 형이상이라는 metaphysical의 구성어인 meta~ 란 뛰어넘다는 뜻이다 즉 사물(physical)을 뛰어넘는 세계다. 뛰어넘는 것은 곧 개념을 이미지로, 관념을 새로운 이미지로 치환시킨 자리다. 단순하고 견고한 이미지와 애매하고 광범위한 영역에 속하는 관념의 합일이다. 이것은 시인의 감성을 남과 다른 의미로 창조하여 재해석하는 부분을 뜻함이다.

필자는 형이상시의 이름을 융합시라 명명했다. 이것은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물과 관념을 새로운 상상의 것으로 만들어 내는 융합성의 기전과 가치에 중심을 두고 명명한 이름이다.
예시는 랜섬의 이론을 잘 보여주는 전형이 된다.

첫 연은 독이라는 질그릇의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옹기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고 있다. 2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3연에 가서 의인화시킴으로, 질그릇에게 생명을 흡입시켜 살아나게 한다. 이 말은 사물이 시인의 감성과 융합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4연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독이 시인과 하나가 되어, 시인의 감성을 드러내고 있다. 2연에서 진술한 것처럼 특별한 모습인 아닌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3연에서 독처럼 숱한 세월을 이름도 없이 하늘 뜻에 순명(順命)하면서 살아온 시인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둑의 연약성인 깨짐의 단계 즉 죽음의 단계를 초월한 의지를 굽히지 않으려는 자세라고 말하고 있다. 자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연에서 저녁별로 은유한 꿈의 상징은 시인이 추구한 희망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그것이 시인의 소망과 믿음이며, 곧 형이상 담론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 제목을 「자화상」으로 붙여도 무방하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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