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우리의 딸이며, 아들인 준희와 원형이의 피가 땅에서 부르짖는다. 또 하늘에서 사무친다. 죽임을 당한 준희와 원형이가 억울해서 땅과 하늘에서 부르짖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죽임은 이 나라에서 학대를 받으며, 죽임을 당하고, 나라다운 나라, 가정다운 가정, 건강한 사회에서 아이들이 학대를 받지 않고 살아가게 해 달라는 피맺힌 ‘한의 절규’이다.

그래서 부모와 이웃, 그리고 계모와 계부에 의해서 죽임당한 아이들이 흘린 피는 하늘과 땅에서 사무친다. 원형이 사건 이후에서도 죽임을 당하는 아이들은 끊임없이 생겨났으며, 년말 전주에서 일어난 준희의 죽음에 대해서 국민 모두는 외면할 수 없다. 국민 모두가 분노하며, 다시는 이와같은 일이 일어나지를 않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5개월된 아이가 엄마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며, 3남매가 젊은 엄마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류의 운명을 걸머쥐고 죽은 죽음 이듯이,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이 땅의 죽임을 당하는 아이들의 죽음도 운명을 걸머쥔 죽음이었다. 준희와 원형이가 친부와 친모에 의해 힘없이 죽어갈 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그 곳에 있었고, 그리스도를 살린 하나님이 함께 있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 해방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원형이와 준희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땅의 아이들 가운데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는 교회당의 지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죽임 당하는 아이들의 위에, 이들의 죽음의 현장에 있어야 한다.

오늘 그리스도는 목사나, 장로나, 집사들이 있는 교회당에 있다기보다 죽임 당하는 아이들의 자리에, 이들의 고통스러운 자리에 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오늘 죽임을 당하는 아이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신다고 믿는 사람은, 하늘은 무심치 않다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죽임을 당하는 아이들의 한의 소리, 피의 절규를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2천년전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가 오늘 살아있다면, 죽임을 당한 아이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있다. 그래서 죽임당한 아이들의 피의 소리를 하늘과 땅에 사무친다. 그리고 국민들은 행동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피의 소리를 들으시고, 이들 가운데서 역사하신다. 그렇다. 하나님은 카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벨의 ‘피의 소리’를 들으시고, 카인을 향해 네 동생 아벨(이웃)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다.

오늘을 살아가는 산자들은 죽임을 당한 원형이와 준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가 부모로서, 국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그리고 도리를 다했다면,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교회와 국가. 그리고 이웃들이 부모와 계모, 계부에 의해서 학대를 받는 아이들 속에서 할 일을 다했다면, 아이들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의 허물과 잘못 때문에 죽었다. 우리가 할 일을 않했기 때문에 이 땅의 아이들은 계속해서 살해당하고 있는 것이다. 죽임당한 아이들은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을 대신해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우리는 이들 앞에서 “준희야, 원형아 우리가 잘못했다. 너희들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이제 우리가 죽임을 당하는 아이들이 없게 하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안일한 생활,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생활을 회개해야 한다.

정치인들은 이 땅에서 죽임당하는 아이들이 없도록, 학대받는 아이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법적인 장치를 만들고, 국민들은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가져야 한다다. 교회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여야 할 것이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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