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고 현 목사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서 성만찬이 제정되었다. 그런데 그 만찬은 유월절과 깊은 관계가 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유월절에는 양을 잡는다. 이 양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과 해방을 위한 희생제물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희생양의 죽음으로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의 죽음은 교리적으로 대속적인 죽음으로 규정되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대속적인 죽음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은 생명공동체, 나눔공동체적인 의미로 이해된다.

예수님의 몸은 함께 나누어 먹는 떡이며, 피는 함께 나누어 마시는 포도주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생명공동체의 의미가 약화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생명공동체로 육화된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의 삶과 운동으로부터 이해해야 한다. 그는 그의 운동의 결과로 죽었다. 죽음으로써 그의 하나님나라운동은 실현되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나누는 삶과 섬기는 삶을 살았다. 그의 죽음은 나눔의 극치이다. 그는 나누다 나누다 결국 자신의 살과 피까지 함께 나누었다. 그의 죽음은 생명공동체와 나눔공동체의 철저한 실천이었다. 예수님은 나눔은 한마디로 성서의 경제정의이기도 하다.

최후의 만찬은 예수님이 죽더라도 생명공동체, 나눔공동체는 남았다. 예수님은 생명공동체로 부활하신다는 것을 말해 준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상이나, 정신 속에서 만날 수 있는게 아니다. 구체적인 삶 속에서 생명을 나누어 먹는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가장 물질적이고 일상적인 생명을 나누어 먹는 자리에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성서의 가르침이다.(박재순 교수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

엠마로로 가는 두 제자는 함께 생명을 나누어 먹을 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누가복음 24장 13절이하). 부활하신 예수님은 흔한 밥을 함께 먹는 자리에 나타나 함께 음식을 먹는다. 부활한 예수님의 친교도 함께 나누는 것으로 표현된다.

“보라.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요한계시록 3장20절)

주일학교 시절 귀가 따갑도록 듣던 동화의 이야기가 바로 이 성경귀절을 근거로 하고 있다. 최후의 만찬에서 제정된 성만찬은 생명공동체, 나눔공동체운동의 확증이다. 이 운동을 영원히 뒷받침하기 위해 성만찬이 제정된 것이다. 성만찬에서 하나님과 생명, 나눔이 통일적으로 결합된다. 이 결합은 하늘의 결합이며, 하늘과 땅을 갈라놓는 불의한 체제에 대한 변혁의 상징이다.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성만찬 제정에 관한 말은 모두 하나님나라 도래와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지금 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나라운동의 표징이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서 제자들과 함께 마실 때까지 다시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말한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밥과 포도주는 하나님나라의 완성과 결부되어 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성만찬에 참여해 떡과 포도주를 마시며,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실현을 위해 간구하는 것이다.

예장 보수 총무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