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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3월1일 만세운동의 현장에 33인은 없었다”2.8동경독립선언 99주년, 3.1만세운동 99주년 역사적 재조명 활발(1)
유달상 기자  |  yds12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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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30  15:5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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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동경독립선언 99주년, 3.1만세운동 99주년을 맞이했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한국개신교를 비롯한 각계에서는 3.1만세운동 재조명에 들어갔다. 3.1만세운동의 새로운 조명은 당연하다. 그것은 3.1만세운동의 주체가 기층민중이었다는 사실과 3.1만세운동이 외국세력(선교사)들의 도움 없이 우리민족 스스로 일으킨 자주독립운동이며, 만세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3.1만세운동의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2.8 동경독립선언 99주년


한국교회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독립운동의 중심에, 아니 사이드에, 그 어느 곳에도 선교사들은 없었다. 오히려 선교사들은 본국 선교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이 땅의 기독여성, 기독농민, 기독학생들을 폭도로 매도했다. 말 그대로 3.1만세운동의 현장에 33인은 없었다.

2.8독립선언 99주년과 3.1만세운동 제99주년을 맞은 오늘, 대한민국을 둘러싼 현실은 참담하다. 일본 아베총리를 비롯한 정치인들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계속해서 쏟아내고 있으며,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들은 적대적인 발언을 통해 분단된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여기에다 일본은 전쟁할 수 있는 나라 군국주의 부활을 위한 평화헌법 개정을 서두르고 있다. 수명을 다한 이씨조선의 말을 보는 듯 하다. 우리는 그 날을 잊지 않는다. 용서 할 수도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거리에는 일본차들이 질주하고, 일본의 관광명소는 한국인들로 넘쳐나고 있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연합단체 소속의 지도자들도 ‘일본선교’, 또는 ‘세계선교’라는 명분을 내세워 대형교회들로부터 구걸해 일본관광을 즐기고 돌아왔다.

일제에 의해 짓밟힌 이 나라, 이 민족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운동이 바로 2.8독립선언이며, 3.1운동이었고, 항일무장투쟁이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5천민 민족은 이 운동의 중심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아녀자와 기독농민, 부랑인, 학생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억해야 한다. 지식인들이 은둔하고, 일본 식민지세력에 쉽게 동화 될 때, 아니 일본식민지세력이 한민족의 민족의식을 말살시킬 때, 이들에게는 작게나마 민족의식이 살아남아 3.1만세운동의 불을 지폈다. 특히 여성들은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기 위해서 아리랑고개를 힘겹게 넘는 남편과 아들, 학도병으로 끌려가는 아들, 정신대로 끌려가는 딸들의 무사귀환을 위해서 여러 모양으로 기도했던 민족의 어머니, 생명의 어머니였다.

민족의 어머니, 밭을 갈아 가족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던 기독농민, 3.1만세운동을 전국에서 일으키는 촉매역할을 했던 기독학생들에 대한 재평가 없이 3.1만세운동 99주년, 100주년은 의미가 없다. 오늘 한국교회를 비롯한 각계서 3.1만세운동 100주년을 1년 앞두고 대대적인 재조명에 들어간 것도 이 때문이다,. 매우 의미 있는 일로 평가할 수 있다.

기독교인 16명이 포함된 33인의 독립선언문은 3.1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에 대해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만세운동의 현장에 없었다. 33인의 독립선언문을 작성하는데 있어 일본 동경 유학생 중심의 2.8독립선언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하와이에서도, 미국본토에서도 독립선언문이 낭독됐다. 3월 1일 33인의 독립선언문은 학생들과 아녀자, 부랑인, 농촌에서 상경한 농업농민들에 의해서 전국에 뿌려졌다, 33인은 명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일본경찰에 자수했다. 당시 기독교 민족대표 16인은 “3.1독립선언이 폭력이 없는 참평화운동 이라고 해서 참여했다”고 한다.


3.1만세운동 참평화를 위한 비폭력 민족운동 평가
2.8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 100주년 맞아 역사적 재조명 절실


3.1운동의 주체는 기층민중

3.1독립선언문이 전 국민에게 뿌려질 수 있었던 것은 지방서 서울로 유학 온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민족 사가들이 33인을 민족대표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3인은 스스로 민족대표라 불렀지만, 분명한 것은 전국의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3.1운동의 중심에는 기독농민과 기독여성, 거리를 떠도는 유랑민, 학생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초등학교 학생들도 만세운동에 가담해 희생을 당했다. 한마디로 학생들은 당시 거대조직을 갖추고 있었던 교회를 거점으로 만세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일본경찰과 헌병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순교를 당한 사람들도 대부분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3.1만세운동의 주체로서 역사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33인에 의해 밀려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3.1만세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1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라를 갈망하던 한민족에게 있어서 자주독립운동이며, 민족해방운동이었다. 그럼에도 3.1만세운동이 민중들의 자주독립운동, 만세운동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조명 받지 못하는 이유는 33인 중심으로 역사가 쓰였기 때문이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난 당시만 해도, 일본식민지세력이 개신교를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의 종교’였다. 당시 한국교회는 어느 조직보다도 단단했다. 결속력도 강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교인들 중에는 ‘양대인’의 세력을 빌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외세 의존적 토착민들이 많았다. 이는 선교사와 교회를 배경 삼아 지역주민들에게 폐해를 끼치는 ‘교폐’ 사건으로 이어졌다. 양대인의 자세는 토착화된 교회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즉 조선의 실정에 맞는 선교활동을 벌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 문화와 신학은 서구교회에 종속적이었으며, 선교사들은 제국주의적인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실정치를 외면했다. 이는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이것은 또한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에 참여하면서, 한국교회의 교파주의와 제국주의적 선교를 그대로 이식시키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가 하나님나라 선교를 감당하지 못하고, 교회중심의 선교에 매몰돼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발견되면서, 한국기독교의 일각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가져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한국기독교역사 대부분은 선교사와 교회설립 등에 대해서 사실적인 것만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한국기독교의 역사를 분열사로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이제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 한국개신교가 가난과 질병으로 인해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종교였다는 사실을 새롭게 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또한 민족·민중사관에서 한국교회를 새롭게 평가하는 작업도 진행되어야 한다.

한국기독교는 수명을 당한 조선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아녀자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개화를 위해 적지 않게 기여했다. 따라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지식인들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피할 수 없었다. 1911년 105인 사건을 비롯한 1918년 동경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2.8독립선언은 지식인 중심의 민족운동이었다면, 1919년 3.1만세운동은 기독여성과 기독농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비폭력 민족운동’이었다.

3.1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황민화 교육정책은 기독교의 잔인한 박해로 이어졌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쉽게 무너지고, 신앙의 자유를 유린당했다. 사실 한국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황민화정책에 쉽게 동화되어 신사참배를 결의, 민족정신 말살과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교행위를 서슴없이 저질렀다. 이에 반해 교회와 사회에서 소외받던 여성들과 유랑민, 학생, 농민들은 기독교지도자 및 지식인들이 변질하고 있는 사이에서,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당시 전문학교의 학생들은 지도층을 믿을 수 없어 별도의 3,1만세운동을 준비했다는 기록에서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33인은 학생들과 파고다공원서 함께 거사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33인은 명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일본경찰에 자수하는 선택을 했다. 이 독립선언문은 이미 학생들에 의해 전국에 뿌려졌다. 또한 학생들은 3월1일 거사와는 별도로 3월5일 서울역에서 2차 거사를 계획했다. 이 거사에 참여하기 위해 평양을 비롯한 전국 각 지역에서 열차편으로 서울로 올라와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3월1일 파고다공원 만세운동과 3월5일 서울역 만세운동은 전국에서 만세운동아 일어날 수 있는 동기가 됐다. 그 중심에 전국에 세워진 교회의 교인들이 있었다.

3.1운동 비폭력, 참평화운동

3월1일 만세운동은 서울 이외에도 평남,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등에서도 일어났고, 3일에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14개소와 함경도 함흥에서도 일어났다. 특히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3월5일 서울역 만세운동은 교회 조직을 바탕으로 전국으로 번져갔다. 면, 리 단위까지 운동에 가담했다. 이렇게 3.1운동이 전국으로 번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 온 학생들이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주동했기 때문이다. 삼일만세운동을 한국교회가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화학당의 유관순이었다. 그녀는 만세운동을 고향인 천안 병천으로 옮겨 놓았다. 부모는 일본 헌병의 총에 맞아 죽었고, 자신도 부상을 당했으며, 7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다가 감옥에서 3.1만세운동 1주년을 맞아 만세를 불렀다가 형사의 고문으로 17세의 나이에 옥사했다.

또한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전국단위의 교회조직과, 서울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이 동맹휴업을 한 이후,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주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학생들은 고향의 지도급인사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의 거사를 계획했으며, 여기에 기층민중인 농업농민과 기독여성, 일반인, 학생들이 참여했다.

민족해방을 위한 기층민중의 봉기는 일본헌병과 경찰의 피비린내 나는 탄압과 학살로 이어졌다. 일본헌병과 경찰의 조직은 강화되었고, 만세운동의 현장에서 무력탄압을 서슴지 않았다. 한민족은 비폭력 민족운동이었다. 안주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3일간 계속되었다. 일본헌병의 총격으로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하고, 8명이 현장서 죽임을 당했다. 강서군 사천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역시 70여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이중 43명이 즉사했다. 20여명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맹산에서는 일헌병의 무차별 총격으로 54명 즉사, 13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것도 일경은 비무장의 시위대들을 보통학교로 몰아넣고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했다.

연안에서는 사망 80명, 부상 32명을 냈다. 선천에서는 즉사 25명, 부상자 23명, 함흥에서는 일본경찰이 곡괭이와 몽둥이로 조선민족을 내리쳐 수십 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끌려갔다. 강서군 산천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은 그 중심에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헌병대가 발사한 총에 맞아 1명이 즉사하고, 8명이 연행됐다. 화성군 제암리는 마을 주민들을 교회당에 몰아넣고,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만세운동으로 전국에서 7천 3백여명의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렇게 3.1만세운동은 전국적인 운동이 되었다. 이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바로 교회이며, 기독교인들과 가난한 기층민중들이었다.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과 지주들은 대부분 뒷짐을 지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내려놓지 않기 위해 일본경찰과 헌병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3.1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된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기독교인 16명도 일제말 일본의 황민화와 우민화 정책에 쉽게 동화되었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해 주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이들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기보다는, 마치 이들이 3.1운동의 주체인 것처럼 비호해 왔다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역사 앞에 부끄러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잊지 말자 그 날의 일본의 만행을

일본의 만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있어 3.1만세운동은 잊을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다. 한국개신교회는 더욱 그렇다. 일본 아베총리를 비롯한 정치인들의 계속되는 망언, 군국주의 부활 움직임 등의 파렴치한 모습은 인간의 탈을 쓴 금수의 짓을 저지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일본의 정치인들이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자신들의 만행에 대해 반성하기보다는, 또 다른 침략을 위해 군국주의 부활에 앞장서고 있다는데 이의가 없다.

이렇게 일본의 우경화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고 있는데도,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은 일본의 만행에 대한 심각성을 모른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지도층 인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을 정당화 해 주는 인사들까지 나타나 한민족의 자존감마저 무력화시키고 있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연합단체 소속의 지도자들은 ‘일본선교’, 또는 ‘세계선교대회’라는 명분을 내세워 대형교회들로부터 구걸해 일본관광을 즐겨 빈축을 사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 이 같은 일들은 ‘한류’ 또는 ‘일본선교’, ‘일본구원’이라는 명분 아래 계속해서 자행되고 있다. 일제에 의해 짓밟힌 이 나라 이 민족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운동이 3.1운동이었다면, 이 운동의 중심에서 죽임을 당한 이 땅의 여성들과 밭은 갈아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던 기독농민, 식민지 민족을 아파했던 학생 등 순교자들을 기억해야 한다.

일본 식민지 아래서 한민족은 정치적 자유, 종교적 자유, 경제적 자유, 문화적 자유를 잃어버렸다. 모든 것이 일본 식민세력의 꼭두각시의 노릇을 했으며, 한국개신교를 비롯한 천주교, 불교 등 모든 종교는 일본 종교에 동화됐다. 특히 개신교는 일본 국가주의에 굴복,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등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교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문제는 3.1만세운동 99년, 해방 76년이 되었어도, 이에 대한 반성한번 없었다는데 있다. 오늘 한국교회가 3.1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굴절된 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굴욕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한국교회는 이 나라의 미래의 주역인 젊은이들에게 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지적의 목소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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