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지난호 계속> 또한 기독교에서도 상례식(喪禮式)에 있어서 입관식(入棺式), 장례식(葬禮式) 또는 발인식(發靷式), 하관식(下棺式) 등을 사용하고 있으며, 여기에 임종식(臨終式) 등을 더하는 경우[교회(목회자)에 따라 다름]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례(喪禮) 용어들은 우리의 전통문화(傳統文化)를 지배(支配)하여온 유교의식(儒敎儀式)에서 빌려온 용어들로써, 불교(佛敎)나 기타종교인(其他宗敎人)들이 별반 의문(疑問) 없이 활용하고 있음으로 그리스도인들도 그리해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대해서는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것들이 많다. 그 럼으로 우리가 인용(引用)하고 있는 용어들이 성경의 가르침과는 분명히 충돌(衝突)되며, 기독교인(基督敎人)들에게 적용하기에는 혼합종교(混合宗敎) 의식(儀式의 색체(색체)가 짙은 요소들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에서 숙고(熟考)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지금까지 인용(認容), 적용(適用)해 온 교회예식서(敎會禮式書) 상의 상례식(喪禮式)에 관한 것도 수많은 논의(論議) 과정을 거쳐 결정하고 활용해 왔고, 또한 왔으리라고 본다. 그렇지만 유가(儒家), 불교(佛敎), 무교(巫敎), 무교(無敎) 인 등의 상례용어(喪禮用語)는 모두 죽음[사망(死亡)]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지나칠 수는 없지 않은가? 따라서 우리나라의 문화적(文化的) 특성(特性)을 따라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데 정당성을 인정하고 묵인(黙認), 방관(傍觀) 하기보다는, 지금까지는 그리하였다 해도, 이제부터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로써는 이에 대한 점검(點檢)을 필요(必要)로 한다.

성경(聖經)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救援), 천국(天國) 등을 말할 때, 죽은[사망(死亡)] 자와 생명(生命) 있는 자, 심판의 부활과 생명의 부활을 분명하게 증거(證據)하고 있다(요 5:24-29 등 참조) 또한 성경에서의 “죽은 자가 일어나게 된다.”는 등의 의미는 영혼(靈魂)과 육체(肉體)가 분리(分離) 된 상태에서 영혼(靈魂)은 이미 “영원한 하나님나라(천국)”에, 몸은 일정한 장소에 두었다가 생명(生命)의 부활(復活)로 일으킨다 하여, 우리는 “몸(육체)의 부활”을 믿는다.(눅 24:1-12, 36-43; 마 28:11-15; 요 20:19-23, 21:12-14; 행전 2:29-32, 10:39-41, 17:18; 고전 15:1-8, 12-19, 32-44, 51-54; 빌 3:20-21; 골 1:19-23 등 참조).

따라서 지금까지의 상례식(喪禮式)에 안주(安住) 하기 보다는, 성경(聖經)의 가르침대로 숙고(熟考)하며, 기독교(基督敎)에 적합한 예식(禮式), 용어정리(用語使用) 등의 연구를 필요로 한다. 이는 성도(聖徒)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다를 바 없는 죽은 자(사망한 자)가 되어 땅에 묻힌다(버려진다)는 의미(意味)가 됨으로, 안식(安息) 곧 성안(聖安)에 들어갔다(입성)고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죽은 자(死者)를 장례[葬禮 = 죽은 사람을 장사(葬事)를 지내는 일)] 하는 것이 된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인 곧 성도(聖徒)의 영혼(靈魂)과 육체(肉體)가 분리되었을 때 임종(臨終 = 목숨이 끊어져 죽음에 이름)이라는 표현 등 보다는, 영혼(靈魂)은 이미 영원한 하나님나라(천국)에 들어갔고, 몸은 “묘실에 두다”(마 27:57-61 등 참조), “잔다.”(고전 15:51; 살전 4:13-16. 행 3:15 등 참조)는 등을 참고해야 하며 로마서 5장 10절의 “죽으심으로”라는 뜻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속(救贖) 곧 죄 사함(히 9:15. 롬 3:24. 엡 1:7. 골 1:14 등 참조) 곧 죄의 대속(代贖. 마 20:28. 막 10:45, 요 1:29 등 참조)을 증거 한다. 따라서 성도(聖徒)에 대하여 죽음을 말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분별력(分別力) 있게 표현(表現) 하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다음호에 계속>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