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찬 목사

다음달 1일이면 3.1만세운동이 일어난지 99년이 된다. 한국교회의 역사 왜곡은 그 어느 종교단체보다도 심각하다. 한국교회가 아니 한국기독교가 역사를 왜곡하지 않았다면, 민족분단의 중심에 교회가 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늘 한국기독교는 민족구원이 마치 앵글로색슨족의 선교의 계기가 된 것처럼 오도한다.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앵글로색슨족 선교사들은 이 민족의 선교를 되찾는 민족의 사명을 마비시키는데 중심에 있었다. 우리는 한민족이 처한 위기에서 하나님의 ‘영의 임재’를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영국과 미국의 위기들이란 한민족의 위기와는 사뭇 달르다. 영미의 선교사들은. 아니 지배이데올로기 신학을 한국교회에 전해준 선교사들은 영미의 상황을 한민족의 상황과 동일하게 생각했다는 것은, 한민족의 선교와 기독교역사를 한국인으로 하여금 왜곡하게 했다.

감리교 선교사 저딘은 “한국의 이 민족적 위기에 있어서, 이러한 동양 선교지들에서의 하나의 희망을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 즉 백성의 생각을 그에게로 향하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그의 지배에 복종하게 하는 그의 능력과 권위의 한 민족적 현현이다. 이것은 ‘앵글로색슨족에 대한 영적 축복인 강력한 신적 임재’요, ‘모든 민족에게로의 그의 은혜의 역사를 확대함에 있어서 지도하도록 준비된, 모든 나라들에 있어서의 이 민족의 대표들(앵글로색슨족의 대표들인 선교사들)의 사명이다”는 잘못된 민족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저딘의 말대로라면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선교사들에게서 배워야 했다. 그렇다 해도 한민족은, 민족의 열망에서의 구원을 절규하고, 통회하는 부흥운동은 앵글로색슨족 선교사들의 주도권에 속하지 않았다. 앵글로색슨족 선교사들은 한국기독교에 있어서 부흥운동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승인했었다면, 한국기독교의 독자적인 선교의 틀을 마련하게 하는 계기를 가져다가 주었을 것이다.

서양세력에 굴복한 한국인들은, 기독교가 서양나라들의 종교라고 서양과 동일화시키고서 서양을 흠모했다. 서양의 모든 것을 모델로 생각했다. 그것은 영미의 식민지신학에 익숙해진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생각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한국개신교는 서양의 음모를 몰랐던 것이다. 이 오류가 오늘 한국기독교가 민족의 문제로부터 이탈하게 하는 시초가 되었다.

그럼에도 여러 차례에 걸친 부흥운동은 한국교회 성장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 이것은 선교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세계적인 주목과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교회성장의 원형이 되었다. 구한말 열강들의 침략과 일본 식민지세력의 등장은 한민족의 구원에 대한 열망을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만들었다.

한국교회는 1884년부터 1904년까지 교인수가 점차로 증가해 1905년도에 5만명, 1909년도에는 50만명으로 급성장했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100만명 구령운동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교회로 몰려와, 이들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비롯한 교육사업, 사회사업에 헌신한 결과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국교회가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을 때 성장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국민들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의 구원을 갈망했다.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선교사들은 ‘정교분리원칙’을 내세워 기독교인의 정치에 관여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막았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3.1만세운동에 참여한 한국인들을 ‘폭도’로 매도해, 선교부에 보고했다. 그럼에도 작게나마 민족 속에 민족의식이 살아남아 3.1운동과 같은 거대한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계기를 교회가 제공했다. 그러나 3.1만세운동의 현장에 자칭 민족지도자 33인은 없었다, 3.1만세운동의 중심에는 민족의 어머니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증언한 기독여성과 밭을 갈아 가족들을 먹여 살린 기독농민, 기독학생, 떠돌이들이 있었다.

예장 한영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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