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3.1만세운동 이후, 거리를 배회하던 떠돌이와 걸인, 농상공업자, 소작인, 가난한 농민들이 교회로 몰려왔을 때 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기독농민과 소작인들은, 소작쟁위 등을 일으켜 일본인들과 갈등을 일으켰으며, 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역시 노동쟁위로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고 했다. 이러한 소작쟁위나, 노동쟁위는 교회를 성장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국기독교가 먼저 농촌에 교회를 세우고, 농민들을 전도한 것은, 선교사들의 종합선교정책이기도 했다. 그만큼 농민을 비롯한 노동자 등 낮은 자들이 순수했고, 새로운 나라를 갈망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일본식민지세력과 영미팽창주의에 길들여지면서, 국내에서 일어난 새로운 사상운동에 대응할 힘이 없었다. 이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오직 구원, 예수 믿고 천당 가라고 외쳤다. 또한 이 때 남산에 신사가 세워졌고, 교회는 전도한 교인의 2/1 이상이 교회를 떠났다. 그것은 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민족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도 하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해방 후 크게 성장했다. 거기에는 민족해방을 미국이 가져다가 주었다는 국민적인 생각이 크게 작용했다. 한민족과 교회는 스스로 해방과 광복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또 다른 세력이 이 땅에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몰각했다. 오늘 한국교회는 교인수가 1300만명에 이른다고 말한다. 그것은 놀라운 교회성장이며, 세계교회의 호기심과 이목을 끌고 있다.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였던 아서 브라운 박사는 자신의 저서 <극동의 지배>에서 “한국민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다. 그리고 한국인의 선교사들에 대한 호의는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보지 못했다”고 한국선교를 전망했다.

식민지 국민으로서, 피압박민족으로서 한민족은 새로운 세계, 새로운 나라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선진국인 유럽과 미국의 선교사들이 가져다준 기독교가 새로운 나라를 열어 줄 구원의 종교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나라를 갈망했던 피압박민족에게 있어 기독교는 한마디로 희망이었으며, 많은 지식인과 밑바닥 생활을 하던 농민, 상공인, 떠돌이들이 교회로 몰려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8.15해방과 6.25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 땅의 국민들은 해방과 6.25 전쟁의 승리를 가져다가 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에 대해 감사함을 가졌다. 일본의 패망이 또 다른 세력인 공산주의의 음모를 읽지를 못했다. 당시 제3의 지대를 강조했던 김구를 비롯한 이동휘, 김규식 등은 교회를 떠났다.

어찌됐든 기독교는 피압박민족, 6.25한국전쟁과 이 전쟁의 폐허 속에 있었던 대한한국 국민에게 희망을 가져다가는 주는 희망의 종교였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기대어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종교였다. 이 민족에게 있어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이들이 교회로 몰려 왔으며, 교회는 자연스럽게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종교로서의 역할을 충실했다.

한국교회가 성장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와 함께 한국교회를 성장하게 한 또 하나의 계기는 네비어스 방법에 위한 한국교회의 자립, 자립치리였다. 그럼에도 자립경제는 어느 정도 실천되었던 반면, 치리권은 선교사들에게 있었다는 사실. 이 문제는 선교사들과 한국기독교에 의해서 철저하게 반성되지 못하였다. 선교사들은 네비어스 방법에 의한 교회성장을 부정했다. 분명 한국교회의 성장은 순수복음 선교와 성경공부에 대한 강조, 근원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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