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불행이 없도록 기도하자

남북분단, 지역갈등. 보혁대결의 상처는 깊어만 간다. 소통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정치인들은 정쟁만을 일삼으며, 한국교회는 악을 보고서도 악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참담하다. 이 땅에서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예측 불허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6.25와 같은 불행이 닥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

헌데 오늘 한국교회의 어디에서도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2.8독립선언 99주년을 맞았다. 3.1만세운동 99주년을 앞두고 있다. 교회는 분열된 모습을 그대로이며, 분단의 상처를 더 깊게 만드는데 앞장서고 있다. 3.1만세운동 제100주년 1년을 앞두고 한쪽에서는 3.1만세운동을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로 삼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국민에 의해서 만들어진 정부를 무너트려야 한다며, 대형집회를 준비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애국운동이라고 한다.

또한 오방과 악령에 길들여져 최순실 국정농단에 의해 탄핵된 박근혜 전대통령을 옹호하며, 현 정부를 탄핵하기 쉽다고 겁박한다. 또 장로인 이명박 전대통령의 잘못을 수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한마디로 오늘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모습은 정교분리를 내세워 일본식민지세력에 협력하며, 3.1만세운동, 민족운동에 참여한 조선의 백성을 ‘폭도들의 폭거’라고 미국선교부에 보고했던 앵글로색슨족 선교사들과 전혀 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3.1만세운동 99주년을 맞은 한국교회는 대형집회를 기획,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기독교선교의 현실적 상황에서 정치적 중립정책을 펼쳤다. 일본식민지 당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한인들이 일인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의무이다”고 했다. 그리고 정치적인 것은 일본 식민지세력에게 맡기고, 선교사들은 영적인 것만을 관여했다. 이는 한민족의 정치적 자유를 박탈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또 재한 선교사들은 한민족에게 ‘구원’, ‘천당’, ‘영적’ 등을 외치며, 그리스도인들의 개인구원을 강조하며, 민족의 아픔과 유리시켰다. 예수님의 집단적인 구원을 외면했다.

1908년 크라크는 “재한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선교부의 공정한 중립정책을 준수했다고, 교회는 영적인 조직체이기 때문에 정치문제에 찬성도, 반대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교인들로 하여금 의병운동에 말려들지 않도록 주지 시켜주었다”고 했다.

식민지 피압박민족으로서의 새로운 나라를 갈망했던 한민족의 아픔을 몰각한 선교사들의 정교분리와 선교중립정책은, 한민족의 항일무장투쟁과 독립운동의 가담을 철저하게 막았으며, 여기에 가담한 기독교인을 징계까지 했다는 사실. 이것은 분명 반한국민족의 노선이었다. 한국교회의 민족사적 계기는 이와 같이 선교사들에 의해 반민족적 방향으로 이끌러 갔다.

순수한 복음이 이른바 서양기독교문화를 초월하듯이, 한국민족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순수성은 개인들과 동시에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세계의 죄악을 꿰뚫어보게 하는 하나님의 의로운 영이다. 동시에 그것들을 극복하고 넘어설 수 있는 힘이며, 능력이다.

기독교는 세계 지배세력과 깊은 유대관계에 있었다. 그것은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앵글로색슨 국가의 팽창주의와 일본의 식민지세력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공통적인 관심이었다. 영미선교사들은 영미의 팽창주의 정책에 따라 한국에 들어왔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한국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여 많은 부을 챙겼다. 쉽게 말해 언더우드는 한국인을 상대로 농기계 장사를 했으며, 알렌은 운산금광을 비롯해 서울의 상하수도 설치권, 전기설치권 등을 수명을 다한 이씨 조선정부로부터 수조했다.

기독교선교가 세계 지배세력들의 불의로부터 자유로웠다면, 서양 기독교 자체와 문제성을 알았다면, 적어도 그러한 정치중립주의를 복음이란 이름 아래 정당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역사를 오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나라를 갈망하는 한민족의 아픔에 응답했을 것이다.

한민족에게 정치적 자유가 있었다면

한민족의 정치적 자유를 박탈한 영미의 중립선교정책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한민족의 역사현장과는 멀어지게 했다. 그럼에도, 또 일제의 강압적인 탄압에도,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민족의식은 존속되어 왔다. 이 민족의식은 3.1만세운동으로 확증해 주었다. 3.1운동은 민족주의와 민족운동의 세계사적으로 보아 19세기 서양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적 방향에서 해석되어 왔다. 그리고 매년 이 관점에서 기념되어 왔다.

3.1만세운동이 피식민지의 민족주의에 입각해 있었다는 사실은 서양의 자유주의적 식민주의와는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3.1만세운동은 가난한 피압박 민족, 기층민중의 민족운동이며, 해방운동이었다. 3.1만세운동은 밭을 갈아 가족들의 양식을 책임졌던 기독농민,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아리랑고개를 힘겹게 넘는 남편과 아들, 그리고 정신대로 끌려가는 딸들의 무사귀향을 위해 기도했던 민족의 어머니, 서울로 유학을 와 민족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꼈던 학생, 부랑인들이 주체가 된 민족운동이었다. 3.1만세운동의 현장에 지식인이었던 민족대표 33인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3.1만세운동은 피억압민족이라는 전제 아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이나, 서양의 민족주의 노선과 같은 방향에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19세기 서양의 브르즈와, 자유주의적 민족주의는 유럽의 제국주의 해체과정에서, 또 해체와 더불어 등장한 각 나라들의 형성이념이었다. 또한 자본주의와 식민주의 세력의 이데올로기였다. 이것이 바로 약소민족의 억압으로 이어졌다. 즉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한민족에게는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의 식민지 국가들에게 해당된 것이었다.

신용하는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것은 일본이 패적국이 아니라, 승전국의 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허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오늘 한국교회가 3.1만세운동이 마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역사의 흐름을 영미선교사들의 영향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1919년 파리평화회의는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5개국이 주축되었다. 한마디로 민족자결주의는 허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승전국들의 신민주의와 제국주의를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 김규식 등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윌슨의 면담거부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에도 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청원운동은 미국과 영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베르사이유 체제는 식민지민족 체제를 거부했고, 세계는 패전국 독일과 사회주의 소련에 대항했다. 일본은 국제연맹 상임이사국 5개국 중 하나였다. 이런 상황에서의 대한민국의 독립이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윌슨 민족자결주의는 한마디로 허구였으며, 한국의 민족지도자들은 이를 알면서도 계속해서 미국에서는 서재필을 중심으로 청원운동을 벌였다. 이런 굴절된 역사는 3.1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바로 잡아야 한다.

3.1만세운동의 비폭력운동에 대한 비난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비폭력은 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와 한국인의 완전무장해제라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지적이다. 또 국제적으로 일본은 승전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민족운동은 비폭력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3.1운동의 지도자들 중 손병희, 이승훈 등은 무장투쟁을 전개할 지도능력과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민족운동은 무장투쟁방법과 비폭력 투쟁방법 모두를 적절히 사용했다고 평가한다. 당시 한국교회의 인사들은 원칙적으로 비폭력방법을 내세웠다. 3.1독립선언문에 이름을 올린 기독교계 민족대표 16인도, 3.1만세운동이 비폭력 평화운동이라고 해서 참여했다고 했다.

3.1만세운동은 한반도를 넘어 세계의 평화운동

3.1운동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평화적노선이란 ‘폭력’은 ‘죄’라는 기독교선교의 영향력을 내포하고 있다. 폭력은 지배세력들의 수단이었다. 한국민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선교사들은 한민족의 민족운동을 ‘폭력은 죄’라는 명분 등을 내세워 정신적으로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한국교회 교인들의 3.1만세운동의 참여도는 놀랍게도 선교사들의 선교정책과는 달랐다.

이만열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3.1운동을 계기로 해서 일어난 민중봉기에 있어 천교도보다 기독교의 동원력이 보다 컸다. 초기에 체포된 1만9천여명 중 기독교인이 3373명으로 17%였다. 참여회수는 1200여회, 주동세력은 340회, 기독교인은 78지역서, 천도교인이 66지역서 주도했고, 양자 공동으로 42지역에서 주도했다. 당시 기독교인은 전체인구의 1.3%에 불과했다. 체포된 자의 17%, 투옥된 자의 21%가 기독교인이었다”

특히 한국교회는 3.1만세운동에 참여한 한국여성들에게 주목해야 한다. 오랫동안 남성지배 봉건체제에서의 억압의 굴레에 갇혀 있던 여성들은 자신의 해방뿐만 아니라, 민족의 해방에 관여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새로운 방향에서의 재평가되어야 한다. 이들은 항일무장투쟁을 위해서 아리랑고개를 힘겹게 넘은 남편과 아들, 일본군 정신대로 끌려가는 딸들의 무사귀향을 위해서 어떤 형태로든지 기도했던 민족의 어머니, 생명의 어머니이었다.

장병욱 교수는 “서울에서 수천명, 전국적으로 1만여명의 여학생들이 3.1만세운동에 가담했고, 587명이 체포되어 기소됐다. 129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들 대부분은 기독여성이었으며, 이화학당에서만 28명이 검거되어 유관순을 비롯한 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배화, 호수돈, 숭의여학교 등의 여학생들이 참여했고, 여성민족운동가들도 속출했다”고 평가했다.

3.1만세운동은 전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이었다. 한국은 물론 세계의 피억압민족에게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3.1운동에 있어서 학생들과 농민층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 주지해야 한다. 그러나 3.1만세운동에 있어서 잊지 말아야 할 하층민들, 즉 기생, 보부상, 백정 등 새로운 나라를 갈망했던 사람들의 참여는 실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들의 은폐된 역사는 발굴하고, 재해석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3.1만세운동은 한민족의 민족운동이며, 민족해방운동이고, 독립운동이었다.

문제는 식민지치하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피지식인들 다수가 유럽인들, 미국인들을 선망하고, 자기민족을 방치하는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이러한 결과는 친서양적 민족노선과 사회주의운동의 분열에 봉착하게 했다. 남북분단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친서양적 민족의식은 처음부터 자가당착적이었으며, 그것은 1938년 친일 조선기독교연합회의 명분론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국기독교의 반민족인 방향은 기독교 선교에 의해서 고착화되어 왔다.

반민족인 방향 기독교 선교에 의해 고착화

1919년 3월 22일과 24일 선교사들과 일본 관헌들의 2번에 걸친 회의는 한민족 독립운동의 진압을 위한 선교사들의 협조를 요청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일본의 법무대신은 10인의 선교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큰 영향을 가지고 있다. 만일 당신들이 당신들의 노력으로 이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일에 기울인다면, 당신들은 많은 봉사를 하게 될 것이며, 이렇게 한다면 당신들은 인류와 평화를 위해 많은 공언을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선교사들은 정치적 중립을 철저하게 지켰다고 한다. 그런데 숭실학교 교장 모펫, 연희전문학교 에비스, 일본과 한국 감리교 감독 웰치, 평양주재 노블 등의 태도표명은 일본 통치를 정당화 해 주는 참담한 모습 그대로였다.

“일본인이 한국에 가져온 물질적인 진전이 있었지만 한국인들의 마음을 끄는 것은 정의요. 정의가 물질적인 그 어느 것보다도 훨씬 더 크게 한국인에게 호소문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들이 인간으로 취급받기를 원하고 그들에게 인격과 가치가 육적인 민족보다 훨씬 더 진실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다 선교사들은 조선민족의 절규를 듣지 못했다. 친일의 죄 일선에 있었던 감리교 감독 웰치는 일본국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1924년 귀국 시 웰치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조선인은 일본지배 아래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언명했다. 그리고 웰치는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대부분 불신자이기 때문에 간섭할 이유가 없다 △선교사들이 정치적인 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부적당한 일이며, 3.1만세운동은 기독교운동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이렇게 모펫, 에비스, 웰치는 한국민족의 문제를 몰각했다. 친일적인 선교사들은 난처한 원칙적 입장,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이들의 방관자적인 입장은 일본을 후원하는 것이었다. 감리교 선교사 노블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선교사들의 일본총독부의 권력자 협력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또 한국인들에게는 다른 희망이 없다는 것을, 또 권력자들에게 복종할 수 있는 권세를 가르쳤다. 감리교 스미드는 일본 정치 아래 있는 한국 상황을 극찬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모펫은 “일본의 잔인무도한 만행을 보면서 중립할 수 없다”며, 일본의 만행을 서양에 알렸고, 장로교 언더우드와 성공회 베크는 제암리 교회 사건을 미국에 보고했다. 그렇다고 선교의 중립정책이 변화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중립정책이 바로 민족 수난의 한 요인이었다는 사실이 반영되지도 못하였다. 이런 영향아래 있었던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지금까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은 결국 분열과 분단의 상처를 깊게 패이게 하는 원인이 됐다.

오늘 한국교회가 분단의 상처가 깊어만 가는데도, 이 땅에서 불행이 닥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는데도,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친서양적 민족의식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념이 민족의 화해와 평화운동을 방해하고 있다. 그리고 세대 간, 지역 간, 남북 간, 민족 간, 노사 간의 적대적인 관계를 조성하며, 힘에 의한 평화 ‘팍스’를 외치게 하고 있다, 그리고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을 부정하면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나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도 되는 듯 연호한다. 분명한 것은 오늘 한국교회가 평화를 위해, 분단극복과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위해서 일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3.1만세운동을 계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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