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폭력 실상 고발 이후 ‘미투 운동’이 문화·예술계로 퍼지고 있다. ‘미투 운동’이란 지난해 할리우드에서 여배우들이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에게 당한 성폭력·성추문 사례를 고발하자 비슷한 피해를 입은 다른 여성들이 “나도 당했다”는 뜻으로 “me too”를 SNS에 올리며 시작된 전 세계적인 성폭력 추방 캠페인을 말한다.

지난 2016년 국내 문화·예술계에서도 한 유명 소설가의 상습적인 성추행이 폭로되면서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문단의 추악한 단면이 드러나 한때 문단 전체에 자정 자숙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가해자인 그 한 사람의 문제로 국한되며 차츰 논란의 중심 밖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러나 지난 6일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유명한 최영미 시인이 ‘미투운동’에 동참을 알리며, 문단에 만연한 성폭력 실태를 낱낱이 고발하면서 그 충격파가 문화 예술계를 넘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분위기이다. 최 시인은 방송 인터뷰에서 지난해 겨울 계간지 ‘황해문화’에 게재된 자신의 시 ‘괴물’에서 묘사한 한 원로시인의 상습적이고 추악한 성폭력에 대해 피해자가 자신 뿐 아니라 전국 도처에 널렸으며, 다른 문인에게 이런 식의 성폭력을 경험한 여성이 문단 내에 한두 명이 아님을 밝혀 충격을 던져줬다.

과거 성폭력의 희생자들은 조직 내의 갑 을 관계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성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1차적으로 자기가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나야 하고, 2차로 “먼저 꼬리친 꽃뱀” 등 자신에게 쏟아지는 참을 수 없는 갖가지 모욕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기에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을 능사로 여겼다. 그런 잘못된 풍토가 일종의 관행처럼 굳어지면서 은밀한 추태를 발설하거나 공개하는 사람 자체가 그 집단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혀 매장당하는 것을 당연시 해왔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곪을 대로 곪은 환부를 도려내지 않고 무조건 덮고 감추는 사회적 분위기가 부채질했다고 볼 수 있다. 오랫동안 가부장적인 남성 위주의 권위문화에 젖어 여성을 인격체가 아닌 성적 욕구의 대상으로 자기 밑에 종속시키려는 왜곡된 성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는 달라지기 어렵다. 위계와 권위의 경직된 조직구조 속에서 독버섯처럼 자라온 성폭력을 주변에서 쉬쉬하면서 눈감아주고 방관하는 사이 곪아터져 이젠 도려내지 않으면 안 되는 막장 상황까지 다다른 것이다.

그런데 성폭력 추문이 검찰과 문화예술계를 넘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마당에 교계는 할 말이 없는가. 가장 거룩하고 깨끗해야 할 교계가 사회 전반에 퍼져버린 성폭력 스캔들과 무관한 청정지대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여성 교인을 성추행하고도 교회를 옮겨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목회를 계속하고 있는 J목사의 사례에서 보듯 목사와 여신도간의 성 추문은 그것이 종교와 결합할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가 단순한 갑 을 관계를 넘어 왜곡된 신앙관의 틀 안에 단단히 결박돼 좀처럼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자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여신도를 성 노리개로 여기는 성직자와, 자신에게 가해지는 성적 착취마저 은총으로 착각하는 무지한 신앙관이 결합해 벌이는 은밀하고도 부도덕한 행위는 세상에 드러나도 결국 어느 한쪽이 똑바로 정신을 차라지 않는 한 끝장내기 어렵다.

차제에 교계는 개 교회 또는 교회기관 내에서 발생하거나 발생할 수 있는 성폭력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놓고 지속적인 자정 노력과 함께 적극적인 감시활동에 나서야 하며, 교회와 교계 내에 약자인 여성을 성적으로 억압하고 유린, 착취하는 불의한 행위의 사슬을 차단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말 더 늦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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