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종 문 목사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부활절인 4월1일을 앞두고,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인 모두는 이 기간에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여기에 참여해야 한다. 일부는 참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간에 절제의 생활을 하며, 도덕적 윤리적으로 깨끗이 하려고 노력한다. 일부는 이 기간에 금식을 해서 식비를 모아 가난한 이웃을 돕는데 사용한다.

그러나 오늘날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중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교인이 얼마나 있는가(?)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늘 한국교회, 아니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을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모두가 개인 중심적인 삶이 아닌가. 이로 인해 민족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외교적 등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다. 한마디로 세상은 빛이 없다. 어둠뿐이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세상의 빛이 되라고 했다.

가정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불안하다. 자살이 생기고, 가정을 이탈하는 아이들이 생기하고, 이혼율이 높아지고 있다. 이는 곧 사회문제로 발전하고 있다. 한마디로 세상은 참담하다. 그렇다고 부자라고 해서 가정이 행복한 것은 아니다. 부자들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을 친다. 가진 것을 지켜 줄 사람, 더 부유하게 만들어 줄 사람을 찾는다. 정치적으로도 이런 사람을 선호하며, 지도자로 선택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우울하고, 가난해도 우울하다. 이런 상황에서 사순절을 시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통해 빛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은, “부자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 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 바꾸어 말하면 부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이다. 한국 개신교는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에 교회를 세우지 못했다.

오늘 세계는 불안정 속에서 있다. 언제 어디에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다. 특히 한반도 둘러싸고 일어나는 주변국들의 적대적인 관계는 한반도가 제3차전쟁의 진원지, 화약고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여기에다 일본의 아베정부는 한반도의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 전범국가인 일본은 제2차 대전으로 망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통해 많은 부를 얻어 복구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가진 일본이 한반도의 평화를 바란다는 것은 기호이다.

이제라도 이러한 난국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인들은 한반도의 평화를 노래해야 한다. 그리고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인 예수님의 삶의 자리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 그곳은 분단의 현장이며, 평화통일운동이 아니던가. 우리는 평창올림픽에서 보았다. 애국가를 누가 불렀는가. 한국에서 태어난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애국가를 불렀다는 사실. 이것은 이방인라도 함께 화해하고, 평화를 정착하라는 메시지가 아닌가. 이사야나, 예수님은 떠돌이 이방인들의 구원을 먼저 선포하지 않았던가.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받으면서, 세상에 빛을 비추어야 한다. 고난에 참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한마디로 가짜이다. 이들은 자기 밖에 모른다. 고난 속에서 희망을 말하는 사람만이 참 그리스도인이다.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잊고 살았다. 고난당하는 민족 속에서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천국’, ‘천당’, ‘구원’, ‘성령’, ‘복음’, ‘민족복음화’ 등을 외치며, 민족의 아픔을 외면했다. 3.1만세운동 99주년을 맞은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예장 통합피어선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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