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헌철 목사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경 ~ 1384년)는 영국의 종교 개혁자로 평가 된다. 그는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로부터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계속해서 교황의 권력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탄핵하며 교리에 공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가 신학적으로 과감하게 교회를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의 '보이는' 교회보다는 선택받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교회를 믿을 수 있게 해준 강력한 예정설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주로 비판한 대상은 화체설 이었다. 보편개념들이 실재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 실재론자였던 그는 만일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없어진다면 존재도 없어진다는 이유에서 화체설을 비판했다. 그런 다음 더욱 노골적으로 화체설이 우상숭배이며 비성서적이라고 단죄했다. 그는 화체설을 '빵은 축성을 받은 다음에도 그대로 빵이다'라는 잔류교리로 대체하고, 물체의 형태를 지니지 않는 실재임재의 이론을 덧붙이려고 시도했다.

한편 그는 교회법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며, 교황·추기경·성직자들에 대해서는 보수가 높은 세속 직업이라고 혹평했고, 수사들과 탁발수사들에 대해서도 14세기 종교논쟁에서 사용된 것보다 훨씬 더 신랄한 용어로 비판했다. 그에게는 도덕적인 진지함과 개혁을 바라는 진정한 마음이 있었다.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조직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교회 조직이 잘못되어 있었고, 이를 비판하는 데 독설을 사용해도 괜찮다고 진정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교황은 적그리스도이다.”라고 하였고 훗날 여기에서 더 나아가 교황권 자체를 철저히 부정함으로, “모든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보았다.(참고 : 위키 백과)

후에 종교 개혁 운동의 여러 원리는 모두 그의 교설 가운데서 싹텄다고 하며 위클리프 파 사람들에 의해 각지에 퍼졌다. 그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운동에도 기여 하였으며, 민중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라틴어로 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여 마침내 1382년에 완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382년 5월 런던 “블랙프라이어스”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위클리프’의 많은 저서들은 정죄를 받았고, 옥스퍼드에서는 그의 추종자들까지도 이에 굴복하기도 하였다. 그 뒤 그의 모든 글들이 금서로 공포되었으며, 그해에 위클리프는 “루터워스”에서 중풍으로 쓰러졌으나, 계속하여 많은 글을 남겼고 마침내 1384년 12월 중풍이 악화되어 별세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 독일의 보덴호수 에서 개최된 콘스탄츠 공의회의는 그에게 “45가지” 오류로 정죄하였고 그로 인하여 1428년 위클리프의 유골은 파헤쳐 불태워졌다. 이후 ‘루터’와 ‘칼빈’을 추종하는 개신교인들 중에는 ‘존 위클리프’를 순교의 반열에 들은 자라는 평을 하는 이들도 있다.

참으로 악랄하기 그지없는 만행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죽ㅤㅇㅡㄵ k까지도 재판하여 그 유골을 불태우는 자들은 어던 자들인가? 사람인가? 짐승인가? 악마들인가? 종교재판의 실상을 알면 참으로 비극의 역사가 아니고 그 무엇이란 말인가? 어찌 그리도 잔인함을 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진정 존 위클리프가 말한 대로 그들은 “적그리스도”인가? 따라서 개혁자들을 죽음이 조롱 받지 않도록 21C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악랄한 그들의 전철을, 아니 그들의 모양이라도 본받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인데.....?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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