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두 군데서만 나타난다(행 11:26, 벧전 4:16). 이 가운데 베드로서신에는 당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성격을 짐작할 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 살인자나 도둑과 같은 범죄자와 같은 사회적 인식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불린 것이다. 이로 보면 박해시대에 그리스도인은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척결해야 할 범죄자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서신은 오히려 그런 그리스도인을 적극 옹호한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게 되면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당시 그리스도인에게 박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박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물론 박해 가운데서 모두가 담대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후회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동료를 원망하고, 밀고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난을 영광으로 향하는 길로 여긴 것은 분명하다. 왜? 그 길은 예수께서 가신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하신 말씀이 이를 반영한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고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마 20:18-19).

예수께서 고난에 넘겨질 자신을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그’라고 3인칭으로 말하는 게 예사롭지 않다. 왜 그랬을까? 자신을 고난 가운데 넘겨진 사람, 내가 나를 주장할 수 없는 사람, 내게 닥친 고난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를 ‘믿는다’ 혹은 ‘따른다’는 말은 충분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예수에게 ‘넘겨진 사람’이라는 표현이라야 맞다. 예수 믿는 것은 예수에게 자신을 넘겨준 것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나를 주장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나를 ‘그’로 불러야 할 사람이다. 오직 예수만이 나를 주장하게 된 사람이다. 우리 시대에 과연 그런 믿음을 찾아볼 수 있을까?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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