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 언 창 목사

개신교인은 1990년 1200만명 정점을 찍고, 지금은 700만명이라고 한다. 한국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은 1960부터 1990년도까지이다. 역사적으로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동기는, 교회가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국민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을 때 성장했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한국교회는,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병자, 장애인, 노동자들과 함께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듯이, 한국교회도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서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을 때 크게 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교 초기 한민족은 새로운 나라를 갈망했고, 기독교 선교는 그 대안이었다.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에도, 해방이후에도, 한국교회는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교회로 몰려 왔다.

그러나 개신교 선교 초기 한국교회의 성장은, 크리스천 선교 역사상 이레적인 성장이었다고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것은 한국 민족적 위기에 기인된 것으로, 혹은 선교사들의 성공과 네비우스 방법(선교의 재정적 자립)에 의한 성공을 말하는 것으로, 혹은 한국 민족의 유순한 종교성, 혹은 병리적 폭발로, 혹은 서양의 추세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모든 해석과 관찰은 교회성장의 현상을 어떤 측변들을 암시해 주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영미 선교사들의 선교와 한국 복음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간과되어 왔다. 초기 한국개신교 선교는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까지 민족적인 또는 개인적인 구원의 동기가 교회성장이 주된 원인이었다. 개신교 선교가 1885년 처음 시작되었을 당시 한국의 민족적 주권과 사회, 경제, 정치적 상황은 완전히 혼동된 상황이었다.

그 상황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열강들, 특히 일본의 침략과 서양 자본주의의 팽창주의에 의해 초래되었다. 급속한 교회성장의 물결은 1895년에 나타났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했다. 동학은 성양 문화와 종교에 대항해서 일어난 하나의 종교운동이며, 민족운동으로 1860년 무렵 최재우에 의해 창시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은 처음 전제적인 봉건 관료들에 대항해서 일어났다. 봉건적 계급사회에 대항했다. 1894년의 농민전쟁은 정의와 인권에 억눌린채 살아가는 이 땅의 가난한 농민들의 요구였다. 청국은 농민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 다음에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군대를 파견했고, 청국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결국 청일전쟁으로 이어졌다. 1895년 일본의 승리는 한국 민족의 전통적 가치관 봉괴, 즉 유교적인 윤리관, 사회질서, 종교적인 신념들, 문화적인 유산들과 같은 가치체계 붕괴가 옛 중국의 왕조 패배로부터 예견되었다.

일본의 승리는 서양세력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서양의 가술문명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일본은 한국에 앞서서 그것을 채택하였고, 성공했다. 서양 기술문명의 힘으로 한국을 침략했기 때문이다. 민족적 위기에 처해서 한국민족은 민족적인, 또 개인적인 구원을 찾고자 교회를 찾았다. 교회는 바로 서양문명과 접촉에 있어서 하나의 창구로서 우리민족에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민족적 위기가 교회성장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주권이 박탈된 상태에서 교인증가의 수단이었던 교회부흥운동들이 나타났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한국 민족에게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시기였다. 당시 교인의 수는 배가로 증가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 땅에서 치러진 러일전쟁 역시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이 승리하도록 배후에서 외교적,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을사보호조약은 일본 수상 가쯔라와 미국의 루스벨트의 밀사인 테프트 사이의 밀약에 의해서 강행되었다는 사실.

예장 웨신 부총회장(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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