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지난호 계속> 사람들은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등에 관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일까 유행가 가사 중에는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하고 “지금 어디로 가야하지?” 하며, 그 방향과 목적지에 대한 방황 속에 삶의 고민을 노래한다. 그러나 우리는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등에 대한 관심을 갖고, 분명한 목적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하기 때문에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 오내“ 등을 찬양을 한다.


그래서 인문학 곧 언어, 문화, 철학, 역사 등, 나아가 경제학, 법학, 공학, 군사학 자등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신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누가 당신의 동반자가 되어 줄까요? 당신의 종착점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등에 대한 질문을 갖게 하기도 한다.

그럼으로 ‘석가’는 유언록(遺言錄)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물은 덧없으며, 결국 죽는다.”고 하였고, ‘공자’는 “아침에 길을 알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겠다”라고 하였다. 또한 ‘맹자’는 유언록(遺言錄)에서 “지는 꽃처럼 현자는 그렇게 가는구나.”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등)고 말씀 하셨고, 성경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임을 증거 함으로, 오직 한길, 동반자도 예수님 한분, 목적지도 하나님나라(천국) 가 되는 복을 누릴 것을 선포 한다.

인생길에 있어서 하나는 영원한 생명[천국(天國)]을 향한 길(吉)이며, 다른 하나는 영원한 죽음[지옥(地獄)]을 향한 길(吉)이다. 그럼으로 정치, 경제, 법률, 인문학, 철학, 심리학 자 등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간다고들 한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일까,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은 “믿음의 선진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였고 우리 역시 두려워하였다”라고 한다. ‘마호메트’[마호메트 또는 모하메드(Mohammed, Muhammad, Mahomet)] 역시 죽음의 문턱에서 고열과 그에 따른 괴상한 환상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신에게 “알라시여, 나의 사투에 함께 하소서”라는 마지막 청원을 하기도 했다.(출처 : 유언. Hans Halter 지음. 한윤진 옮김. 말글빛냄.2006. P45)

또한 본성적 죄[罪 (죽음)] 가운데서 살아가는 인간의 종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죄악 된 사람들 등의 종착점은 지옥(地獄)임을 성경은 증거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안식(安 = 편안할 안. 편안 안. 息 = 숨 쉬다. 한 호흡. 자라다. 번식하다)의 한문의 어휘로 보면 그 의미를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는바, 안식(安息)이란 죽(사망)은 상태를 말함이 아니라, 그와는 정 반대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평안(平安)의 삶의 복(福)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성도(聖徒)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정 속에 선택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로 믿어진 그리스도인[성도(聖徒)]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요1:12 등 참조)의 삶을 누림은 물론 천국 곧 영생복락(永生福樂 =영원한 영화)을 누릴 곳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가기 때문에 육체와 영혼의 분리 곧 거룩한 안식[성안(聖安). 평안(平安)]에 들어감이 전혀 두렵지 않음으로, 오직 부활소망(復活所望)의 복을 누리게 된다.

<다음호 계속>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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