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따라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시어 십자가상에서 죽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 죽으셨다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요19:30)고 말씀하시고, 영혼이 떠나셨다(마27:50. 요19:30)라고 증거 함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바위 속에 판 새 무덤에 모셔두었다[마27:60. 安放在(안방재)]라고 증거 함으로, 예수님의 안식(安息), 평안(平安), 부활(復活), 승천(昇天) 하심과 재림(再臨)을 등을 약속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면, 예수님께서 부활승천(復活昇天) 이전 까지는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표현은 없다. 단지 부활승천(復活昇天) 이후부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 다시 살아 나사”(고전 15:3-4 등) 라고 증거 할 뿐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표현을 할 때에는 그에 대한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 대목에 대한 설명되어져야 한다.

신약이 증거 하는 안식(安息)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볼 것 같으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고, 온유와 겸손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섬김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완성된다. 이는 율법으로는 실현되지 못한 안식이, 에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에게 주어지기에 이르렀다. 그럼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힘쓰라고 권한다(히 4:11).또한 요한계시록은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라고 함으로 천국에서의 영원한 안식까지를 증거 한다. 또한 성경에서 증거 하는 안식(安息)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안[平安. 평강(평강)][요14;27 ; 16:33. 행10:36. 롬15:33 ; 16:20. 고후13;11. 살전5:23. 살후3:16. 빌4:7, 9. 골3:15. 히13:20. 신12:10. 사9:6 등 참조) = 마10:13.(eijrhvnh< 명주여단 평안이 peace.⃞평화⃞,(함축적으로)⃞번영⃞, 하나가 됨, 고요, 안식, 다시 하나가 되다). 롬1:7. 고전1:3. 고후1:2 ; 13:11. 갈1:3. 엡1:2. 빌:1:2. 골1;2. 살전1:1. 살후1:2. 딤전1:2. 딤후1:2. 딛1:4. 몬1:3. 벧전1:2. 벧후1:2. 유1:2. = 마28:9(평안하냐? = 행복하냐?] 또한 Caivrete. 동명현능복2 평안하뇨 = 5463 caivrw chairo 본동사;⃞유쾌하게 되다⃞, 즉 은은히⃞행복하다⃞,⃞유복하다⃞일반적으로 특히 인사와 같은 것(만남이나 헤어짐에 있어)⃞안녕⃞, 인사하다, 환영하다, 축하하다 (눅 10:20; 빌 4:4)] 등을 함의(含意)한다.

그래서일까? 약자(弱者)들에게 사랑 받았지만 강자(强者)에게 죽임을 당한 ‘얀 후스(Johannes Huss)’는 “오늘 당신들은 볼품없는 거위를 불에 태우지만, 100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당신들이 영원히 태워 없앨 수 없는 백조의 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이오!”라고 하였다.(참고 : Ibid. PP470-472)

또한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는 “ 당신들은 내 육체를 죽일 수 있지만 내 영혼은 죽일 수 없소”라고 말하는 등(참고 : Ibid. P479), 믿음의 선진들은 영원한 평안의 안식을 순교(죽음) 하기까지의 믿음으로 당당하게 받아 들였다.

이와 같이 성도(聖徒)는 죽음이후를 두려워하지 않고, 거룩한 안식[성안(聖安). 평안(平安)]과 부활(復活), 영생복락(永生福樂) 등의 소망(所望)의 복(福)을 누리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 누리는 소망(所望)의 지복(至福)을 이웃과 함께 나누도록 하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5-26)

<다음호 계속>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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