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 언 창 목사

기독교선교는 서양세력과 불가분했음에도, 선교사들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는 정치 불간섭의 노선 혹은 중립정책을 처음부터 원칙으로 삼았다. 선교의 정치적 중립노선은 1897년 이래 미국에 의해서 요청되었다. 이것은 1912년 신민회와 관련된 105인 사건을 계기로 해서 영미선교부의 공식정책으로 천명되었다. 1912년 장로교 공의회는 정치불간섭을 공언했다. 당시 전덕기 목사를 비롯한 기독교지도자들은 선교사들의 정치 불간섭에 항의하며, 민족해방과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주창했다.

1912년 선교사 브라운은 미국 선교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현지 선교사들은 선교부와 같은 보조를 취하여 합법적으로 성립된 관권을 존중하고, 그들이 하는 일을 필요 없이 방해하지 않도록 각별 주의 할 것이며, 또한 그 나라의 모든 법령을 준수하며, 자기들이 일하고 있는 나라의 정부에 대항하면서 기독교를 전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다소간 불의가 있더라도 참고 견뎌야 된다”고 했다.

장로교 선교부의 선교정책은 일본 침략세력을 합법화시켰고, 한국교회를 지도했다. 순수하게 영적인 복음은 정치를 초월한다는 복음 이해가 이 보고서에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그 순수복음 선교라는 것은 이미 세계의 지배세력과 결부되어서 식민지세력들의 길을 평탄하게 해 주는 정치성을 전제하고, 또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순수복음은 없었다. 한마디로 한민족의 정치적 자유를 박탈한 것이다.

선교사 모펫은 정치와 선교의 완전분리를 주창했다. “처음부터 평범하고 소박하며 순수한 복음선교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 선교의 현실적 상황에 대한 착각이었다. 어쨌든 선교의 정치중립정책은 그러한 영적인 순수복음 선교라는 도피처를 전제하고 있었다.평양에 있었던 블레어의 태도표명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선교사)는 한국교회가 일본인을 미워하는 생각을 회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죄에 대하여 똑똑한 깨달음을 지켜야 될 줄 안다. 우리는 국가사정에 상실한 사람들이 마음을 돌이켜서 주님과의 개인적 관계에 성의를 두어야 한다고 느꼈다”

불레어의 개인주의적 죄의 개념은 완전히 침략세력의 집단적 세계적 죄악을 간과해 버렸다. 불레어의 기독교선교는 이미 침략세력과 결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낸다. 의병운동이 곳곳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던 한 장로교 선교사의 고백은 정치적 중립의 정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구체적 원조를 주지 못하는 나는 교인들의 중대사건에 무관심하고, 또 나의 사랑은 공허한 것으로 한국인에게 해석되어, 결국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떠나가고, 이따금 다른 기관(사회주의, 또는 항일무장단체)에 가입하기도 한다”

그렇다. 수명을 당한 이씨 조선 아래서 한민족은 새로운 나라를 갈망했다. 따라서 봉건주의 체제서 억압당하던 가난한 민족은 교회로 몰려왔다. 그런데 선교사들의 정치적 중립과 일본식민지세력과 결탁하면서,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자, 노동자, 농민 등 새로운 나라를 갈망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을 때 크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예장 웨신 부총회장(사무총장)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