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9월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카예탄에게 루터를 거칠게 다루지 말라는 것과 체포하지 말 것을 요청함.

9월 26일 루터가 카예탄과 회합을 위해서 비텐베르그를 떠남.

10월 12-20일 루터가 아우구스부르그에서 카예탄의 환대 속에서 논쟁함. 카예탄은 루터의 58조가 교황의 선언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7조에서 루터가 고해성사를 받을 때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박함. 루터는 교황의 선언이 종교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결의된 것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람을 의롭다고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가능하며, 성례를 통한 행위나 선행으로 성취 하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함.

10월 23일 누렘베르크로부터 돌아온 루터가 카예탄에게 전달된 교황의 서신(Postquam ad aures)에 담긴 의도를 파악한 후, 매우 낙담하게 됨. 로마 교회 내부에 적그리스도가 사역하고 있음을 염려함.

10월 25일 카예탄이 선제후 프리드리히에게 루터를 영지에서 추방하고, 교황청에 신병을 인도하라고 요청함

11월 9일 교황 레오 10세는 카예탄에 의해서 작성된 문서(Cum postquam)를 통해서 면죄부에 관한 가르침을 재차 강조함.

11월 프리드리히가 카예탄의 문서에 대하여 루터에게 논평을 요구함. 루터는 교회에서 일반회의로 개최되는 합법적인 논의를 청원함.

12월 초 프리드리히는 카예탄의 요구를 거절하고 루터를 보호하는 조치를 취함.

1519년 1월 삭소니 지방의 귀족이자, 교황청 고문이던 칼 폰 밀티츠(Karl von Miltitiz, 1490-1529)이 양측의 중재자로 나섬. 황제 막스밀리언 1세 사망. 교황청은 더 이상 루터 압박을 하지 말도록 중지하라는 권유서신 발송

3월 존 에크가 라이프찌히 논쟁에서 루터를 압박하려 하는 13개 주제를 제시함.

칼쉬타트가 6개월 전에 제출한 논제에 대해서 반대하는 내용들임.

5월 루터가 라이프찌히 논쟁에서 에크와 토론하게 되는 13개 논제를 반박함. 루터는 13항에 대해서 강력하게 거부하는 내용을 출판함. 그 핵심내용은 “지난 4백 년 동안 발표된 교황청의 무절제한 선언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은 로마 교회가 다른 모든 교회들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지난 1,500년 교회 역사에서 받아들여진 이 기준은 성경본문과 니케야 종교 회의의 신조에 위배되는 것이다.” 루터는 로마의 주교가 신적 권위를 가지고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주장을 완강하게 배척했다. “나는 교황이나 교황의 이름을 두려워해본 적이 없다. 그보다 아래 있는 자들이나 꼭두각시 등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6월 24일 라이프찌히 토론을 위해서 루터와 비텐베르그의 대표단들, 칼쉬타트 도착.

6월 27일 에크와 칼쉬타트 사이에 논쟁이 시작됨

6월 28일 챨스 5세가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됨. 로마 교황청은 루터에 대한 정죄를 연말까지 잠정적으로 중단함.

7월4-14일 에크와 루터가 토론함. 에크는 루터가 마치 새로운 후쓰와 같다고 비난함. 루터는 후쓰와 보헤미안들이 고백한 신앙은 대부분이 가장 뛰어난 기독인들임을 입증하는 것들이었고, 복음적이었다고 논박함. 에크는 이들이 과연 콘스탄스 종교회의(1414-18)에서 정죄된 것이 오류인가라고 루터에게 추궁함. 루터는 오직 성경만이 교회가 판단을 내리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함.

7월-8월 루터와 칼쉬타트를 옹호하기 위해서 필립 멜랑히톤이 토론내용을 출판.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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