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엄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복음 6장 24절)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의 관계가 양분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예수님은 이미 유대인에서 사제들 가운데 돈이 어떠한 위력을 가졌는지를 보았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서 예수님을 비웃었다”(누가복음 16장 14절)

예수님의 선언은 당대나, 그 후 교회의 역사에서 돈을 좋아하는 성직자들에게는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교회는 역사적으로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기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보다는 맘몬을 더 섬기려 한 것이 교회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로마교회가 그랬고, 중세교회가 그랬다. 그리고 오늘 한국교회가 그렇지 않은가.

마태복음은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한다. 여기에 당황하고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먹고 마실 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한다. 농사도 짓지 않는 공중의 새들,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는 백합화도 하나님이 먹이고, 입힌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대의를 구하라”고 말한다. 그러하면 먹고 마시는 일을 하나님께서 다 해 주신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맘몬에 얽매이지 않고 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마태복음의 선언은 정말 가능한가.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의 내용에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누가복음 16장 1-13절)를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하자 자기 주인에게 빚진자들을 불러 채무를 탕감해 주어 그들의 친구로 삼음으로써 자신의 불확실해진 미래를 준비한다. 그는 자신에게 영리한 행동을 한다. 이것은 주인에게는 불의한 행동이다. 과거 많은 성서학자들은 이 비유를 도덕적으로 해석하려 했다.

누가복음의 하나님과 재물의 문제에서 이 비유를 든 것은 ‘시대적 전환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나라라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관련되어 있다. 청지기의 기만에 대해 주인이 칭찬해 준 것은 그가 이 세상에 도래할 새로운 질서와 그 질서의 내용을 알았기 때문이다. 주인의 기만행위 자체를 칭찬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질서와 도래에서 세상의 아들들(세리 등 죄인들)이 빛의 아들들(유대인들)보다 더 영리하게 행동한 것을 칭찬했다. 그 시대적 전환이란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는 요한까지이며, 그 뒤부터 하나님나라의 복음의 힘으로 밀고 들어올 때“이다.

이것을 모르는 유대인은 이 시대의 전환을 알지 못했고 전통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따라서 청지기 비유와 거기에 나타난 재산사용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전통적인 도덕적 준거들이 아니라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자세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가 도래할 하나님나라의 질서에 대비해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마몬과 바벨에 길들여진 나머지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고, 맘몬을 숭상하며, 경쟁적으로 십자가 탑을 높이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시대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가. 성직자들이 하나님의 질서를 깨고 맘몬을 숭상하며, 교회를 파탄으로 이끈 중세교회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분명한 것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설길 수 없다. 이것은 성서의 가르침이며, 에수님의 선언이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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