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주일이다.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임당한 자의 한의 소리를 듣고 평화를 노래하자.

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야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교회로의 변화 중요
예수님을 교리 및 제도화 시켜 성전에 가두는 잘못을 범해

죽음과 부활을 증언자

할렐루야! 예수 부활하셨네! 부활주일이다. 그러나 죽임 당한 자들의 한의 소리는 곳곳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전쟁과 기아를 피해 보다 나은 삶을 찾아 지중해를 건너다가 죽임을 당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불의한 자, 가진 자에 의해 십자가상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죽임’이라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주목해야 한다. 그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증명하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눌리고, 떠돌이, 불구자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기쁜소식)을 증거하며,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셨다.

오늘 이 세상은 죽임 당한 자들의 한의 소리가 하늘에서 사무치고 있다. 수백명의 어린 학생들을 차가운 바다 속에 수장시킨 세월호 참사는 4년이 지났지만 미완으로 남아 있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생명들이 있다. 세월호의 처참한 모습은 수면위로 올라와 목포 신항에 안착됐지만 풀어야 할 문제는 많다. 또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위안부로 끌려가 시궁창보다도 못한 수모와 치욕과 고통을 당한 위안부들의 ‘한의 눈물’은 아직까지 마르지 않고 있다. 이것 역시 해결되지 않은 미완으로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과 테러, 인종청소라는 미명 아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다. 전쟁과 기아를 피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지중해를 건너다가 한 번에 수백명이 수장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면, 매년 수천명의 아이들이 기아에 노출돼 영양실조로 죽임을 당하고 있다. 세계 10위 경제대국이라는 대한민국 안에서도, 부모에 의해 어린생명들이 죽임을 당하고, 이웃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있다. 또 목사에 의해 아이가, 부인이 죽임을 당했다.

자신이 가해자라는 사실을 잊고, 평화를 외치며,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을 이야기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아침에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할까(?) 죽임 당한 자들의 ‘한의 소리’, 아니 ‘피의 절규’를 듣고, 행동해야 한다. 헌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못하다. 국민들은 이 땅의 평화와 새로운 나라를 갈망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관념에 사로잡혀 권력자와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바쁘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한국교회가 예수님을 십자가의 형틀에 다시 매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활의 아침에 그리스도인들은 조용히 묵상하며,. “네 동생 아벨(이웃)이 어디에 있느냐”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2018년 부활의 아침에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한 민족의 화해, 그리고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희망해 본다. 대한민국을 둘러싼 전쟁위기설이 미디어를 통해 안방에 매일 전달되던 뉴스는,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한 북미정상회담, 남북미정상회담 등 희망의 소식으로 바뀌어 부활의 계절에 전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보수적인 정치인과 한국교회는 관념에 사로잡혀 남북한의 적대적인 발언을 쏟아 낸다. 여기에 일본이 가세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 트럼프 미국대통령, 김정은 위원장 등은 연일 적대적인 발언을 쏟아내며,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한반도에서 제3차 대전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패권주의 부활 움직임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나타났다. 이웃나라를 침략할 수 있는 헌법도 고치겠다고 나섰다, 군대도 창설했다. 또 많은 군인을 세계 분쟁국가와 전쟁 중인 나라에 평화유지군이라는 이름으로 파견했다. 또한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신무기도 도입했다. 또 자체적으로 무기도 생산하고 있다. 여기에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 없이, 우리정부와 계속해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여기에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함에 있어 1분도 안 걸린다는데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다 사드배치를 둘러싸고 대한민국과 중국의 갈등은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경제보복은 계속되고 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반도는 긴장이 완화되고,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화해무드가 조성되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이제 교회도 관념에서 벗어나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한민족의 화해와 평화, 그리고 통일을 위해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죽임 당한자의 ‘한의 소리’ 듣자

부활의 아침, 한국교회는 죽임 당한자의 ‘한의 소리’를 들으며, 이 땅의 평화와 정의와 자유를 위해 기도하며 봉사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 안에서 이런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를 않는다. 죽임당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며, 죽임당한자의 ‘한의 소리’를 듣고 행동해야 할 교회는, 힘의 의한 평화(팍스)를 말하며, 남북한의 적대적인 발언을 멈추지 않고 있다. 한번에 100만명이 죽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을 잃어버린 오늘 보수적인 한국교회 교인들의 모습이다.

또 일부 목사들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향해 “돈 벌려고 위안부에 지원했다”고 아무렇지 않게 기도회의 장소에서 말한다. 이명박 전대통령과 주변 인물들의 검찰 소환과 구속을 보면서 잠만 자고 일어나면 사정당국에 끌려간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영미의 근본주의적이며, 제국주의 신학, 성장주의에 매몰된 한국교회의 이 같은 모습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영미의 교파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교회의 분열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그것은 분단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주의가 성직자들의 사고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교회는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물론,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서 이탈했다.

한국교회는 이웃교단과 이웃교회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연합과 일치를 부르짖는다. 여기에다 여러 가지 행사를 빌미로 부자교회들로부터 모금운동을 벌인다. 우스운 것은 연합단체의 총무들은, 부자교회로부터 구걸해 역사를 왜곡시키며, 한민족의 아픈 상처를 안긴 일본여행을 즐긴다. 예배 때마다 인류의 평화와 민족통일을 위한 기도는 한마디로 허공을 친다.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 바로 한국교회다.

인간의 역사는 이성적이지 못하다고는 하지만, 목사님들의 행동은 해도 너무한다.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한국교회가 성서로 돌아가지 않고서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이나, 미국사회에서 목사는 믿을 수 없는 직업군 내지는 인간군으로 분류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러한 성직자에 대한 불신은 한국교회에 대한 불신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직자의 신뢰성 위기는 곧 한국교회의 위기이며, 선교의 위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삶의 현장인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지 않고, 부자들이 있는 곳에 교회를 세우고, 이들의 눈물을 닫아주는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무식하고, 떠돌이, 과부, 창녀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계셨다. 이곳은 예수님의 삶의 현장이다. 이 곳에서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셨다. 또 인류의 평화(샬롬)운동을 벌이셨다. 부활의 아침,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인류의 평화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 이것이 죽임당한 자의 ‘한의 소리’, ‘피의 절규’를 듣는 것이다.

평화운동,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세계 여러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평화운동은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최소한 몸부림이다. 오늘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내가 이기고, 네가 지는 것’이 아니다. 모두 함께 죽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남북한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국들이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분명한 것은 세계 민족이 모두 살기 위해서는 문제를 무기로 해결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이런 당연한 소리에는 아랑곳 하지를 않고, 강대국들은 무기판매에 혈안이 되어 있다. 제3세계의 가난한 국가들은 독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무기수입에 혈안이 되어 있다. 무기상에 의해서 움직이는 강대국들은 무기경쟁을 벌이며, 재래무기를 갖다가 버릴 곳을 찾고 있다. 그래서 항상 가난한 나라들은 강대국에 의해서 평화가 깨지고, 민족 간에 갈등을 일으킨다.

무기를 팔수 있는 대상이면, 국가적인 차원에서 어떤 지원도 서슴지 않는 것이 강대국이다. 제3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독재정권 아래 있고, 그것이 유지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렇게 실리를 추구하다가는 인류가 멸망할 것은 뻔하다. 많은 나라들이 이를 경험했으며, 경험하고 있다. 얼마 전 미국의 시리아 미사일공격은 이를 대변해 주고도 남는다.

새 무기는 경쟁적으로 계속 개발되고, 낡은 무기는 쌓여가고 있다. 새해벽두부터 미국을 비롯한 러시아, 중국, 일본 등은 무기경쟁을 세계에 알렸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무기는 어떻게 소비하나. 그것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다. 한번 전쟁에 소비되는 비용은 천문학적인 숫자이다. 고통에 죽고 파괴되는 자는 제3세계인들이다. 6.25전쟁을 겪은 한민족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다음 전쟁은 한반도에서 일어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분단극복을 위해서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는 민족상잔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헌신해야 한다.

이러한 역사의 추세를 누가 막고 나설 것인가. 그것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며, 세계 교회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평화를 노래해야 할 교회가 전쟁과 민족 갈등을 부추기며, 평화를 파괴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세기부터 서구에서 일어난 전쟁 대부분은 기독교가 그 원인이었다.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전쟁과 약탈의 신으로 만든 것이 서구 기독교의 왜곡이다. 8세기 테롤 대제의 선교전쟁, 이슬람 무역상들과 베니스 상인들의 갈등을 등에 업고 일어난 11세기의 십자군전쟁,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와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양대 대전 등 대부분의 전쟁은 기독교 국가들에 의해서 자행되었다.

지금도 기독교 국가에 의해서 세계 곳곳서 전쟁이 멈추지 않고 있다. 예수님의 평화(샬롬)를 말해야 할 한국교회는, 힘에 의한 평화(팍스)를 말하고 있지 않은가. 부활의 아침, 한국교회는 세계의 흐름을 직시하고, 반전, 반핵운동의 중심으로 들어가 한반도의 평화를 넘어 세계민족의 평화를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죽임당한자의 ‘한의 소리’와 ‘피의 절규’를 듣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특히 한국교회는 알아야 한다. 동독과 서독이 하나 되는데 그 중심에 독일교회가 있었다는 사실.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교회만큼은 하나였다. 서독교회는 동독의 정치범과 양심수를 돕는데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을 찾는 고난 받는 민족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오늘 영미의 근본주의적 제국주의 신학과 선교정책을 그대로 물려받은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해야 한다. 그것은 한민족 모두의 염원이며, 소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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