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성 목사
2. 인식론과 방법론의 급변

안타깝게도 플라톤의 영향으로 기독론의 정립은 성경과 멀어진 채 혼미를 거듭해야만 했다. 영혼은 인간 존재에서 불멸하는 부분이요, 영원 전부터 선재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영혼이 각각 사람의 몸으로 나뉘어져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영향을 깊이 받은 오리겐 (185-254)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영혼의 교사로서 행동으로 보여준 도덕적인 사표이자 참된 가르침으로 이끌어주는 분이었다. 물질적인 것들의 세계로부터 영혼의 참된 고향인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이끌어주는 안내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성육신, 생애, 죽음, 부활은 영혼의 탄생, 중생, 회귀로 이어지는 전과정의 상징들이라고 보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초대교부들을 구분하여 연구하게 되었고, 칼빈은 모든 나쁜 것은 다 오리겐에서 나왔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오리겐에 의해서 사물을 분석하는 인식론과 물체의 본질을 추구하는 존재론이 뒤섞여버렸다. 역시 이런 경향은 니체와 그 후계자들이 전개하는 현대 신학에서도 나타난다. 더 이상 초월적인 존재가 없고 이 세상에 보이는 실체에 능력을 불어넣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게 되면서, 니체는 자아의 담대한 의지만이 남았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제는 실재하는 것만이 전부라고 하는 존재론적인 실체만을 인정하고 말았다.

중세기를 거치면서 플라톤의 철학은 더 큰 위력을 발휘하여 이원론적인 사고구조가 로마 가톨릭에 팽배하게 확산되었다. 교황의 우위권과 정통성에 집착하게 된 로마 가톨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신학(theology of the cross)보다는 영광의 신학(theology of glory)을 만들어 버렸다.

‘영광의 신학’은 기독교와 플라톤주의가 결합된 후 중세기 동안 우상숭배적인 대안들을 제시했다. 육체로부터 벗어나서 신비주의, 공로, 철학적 회의를 통해서 초월적인 상승을 표현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 가운데 오신 은혜, 하나님의 낮아지심과 은혜만을 강조한다. 비잔틴 동방정교회를 비롯하여 각처에 흩어진 중세 수도원 운동에서 변질되어지기 시작한 기독론은 13세기부터 스콜라주의 신학이 득세를 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립한 7성례에서도 핵심사항에서 밀려나 버렸다. 성직자가 집례하는 성례가 교회의 중심적인 행사이자 신학의 핵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예수님에 관한 고백과 사랑은 밀려나고 말았다. 로마 가톨릭이 가르쳐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은 마리아의 품에 안겨있는 어린 아기 예수라는 그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서구 유럽의 기독교 신학은 흘러내려온 학문연구의 방법론과 특히 철학자들이 제시한 인식론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로 진리에 접근하는 칸트와 헤겔의 이성주의와 데이빗 흄의 경험주의로부터 심대한 영향을 입었다. 레싱(G. E. Lessing, 1729-1781)이 계몽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서 독일 관념론의 언어들을 퍼트리면서 기독론의 혼란을 초래했다. “그리스도의 신념과 신앙”과 당대 유럽의 기독교 교회라는 종교현상과는 서로 다르다는 주장을 펼쳤다. 기독교의 영원한 진리와 복음서에 나오는 역사와는 서로 분리시키는 방법을 최초로 도입하였다.

이렇게 신학의 안목이 확 바뀌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서구 지적 추구의 방법론이 존재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는 것, 사물의 실체 대해서 직접 판단하고 검증하려는 쪽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이것을 외형적 분석(visual analogy)이라고 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그것을 듣는 것(oral analogy)에 따라서 결코 이성적인 독립성을 강조하거나 자율성을 내세우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이 말씀 하신 것을 우선시하였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 신학자의 저술들에 근거하여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이 알려주신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었다. 인간의 죄성과 이성의 상태에 대한 인식이 철저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점차 종교개혁 후기 신학자들을 벗어나면서 타락한 인간 본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인본주의적 자율성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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