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하신 하나님대신 맘몬

한국사회에서도 서양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풍조가 자리를 잡았다. 특히 젊은 사람이나, 지식인과 같은 사회적으로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 사이에 교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난 선교초기부터 1960-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개신교회에 대한 인식과 이해와는 전혀 다른 선교정책 때문이다. 당시 교회는 어려운 사람들의 이웃,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집단으로 인식되어 왔다.

헌데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그렇지 못하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려운 사람들의 이웃이기는커녕, 이들이 드린 하나님의 헌금을 목회자의 욕망과 맘몬의 상징인 바벨탑을 쌓는데 사용되고 있다. 최근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대표회장 선거를 둘러싸고 갖은 다툼으로 한국교회 대표연합기관으로서의 지위마저 휘청거리더니, 이번에는 회원교단 가입과 관련한 속칭 후원금 배달사고 논란으로 인해 격랑에 휩싸인 것만 보아도, 오늘 한국교회가 얼마나 국민적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한기총은 2013년도부터 대표회장 선거를 둘러싸고 법적다툼이 끊이지를 않았다. 이로인해 한국기독교연합회와 분열되는 아픔도 겪었다. 그럼에도 대표회장 선거 때마다 당선자와 후보자였던 사람과의 다툼이 끊이지를 않아 법원이 지정한 변호사가 대표회장 대행을 맡는 수모도 겪었다. 이번에는 모교단의 총회장인 K모 목사가 13회에 걸쳐 Y목사 개인통장으로 송금된 2억6천3백만원의 행방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고 있다. 당사자들은 법적 다툼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이를 둘러싼 논쟁은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 4월 한국교회는 한마디로 참담하다. 사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돈 때문에 신뢰성이 무너지고, 교회의 정체성이 뿌리채 흔들리고 있다. 단체장 및 교단장 선거에서의 금품살포는 한기총의 문제만은 아니다. 감리교는 감독선거를 둘러싸고 수 년동안 법적 다툼을 벌여 왔으며, 한국기독교원로목사회도 전 대표회장과 회계의 공금횡령을 둘러싸고 다툼이 일고 있다. 동 목사회 상벌위원회와 임원회는 해당자들을 제명 등의 조치를 취하고, 법적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돈이 있어야 총회장도 되고, 노회장도 된다. 교회의 장로도 된다. 단체장도 된다. 감독도 된다. 모 교단의 총회장은 10-20억을 써야 선거에서 당선된다는 말도 나온다. 감리교 감독회장은 100억을 쓰고도 떨어졌다는 말도 있다. 어느 교회의 장로는 1억원을 헌금해야만 장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한기총 역시 대표회장 후보로 나서기 위해서는 기본 수억원을 선거자금으로 써야 한다는 말이 회자된지 오래다. 사회선거보다도 못한 것이 교회의 선거이다. 그러면서 교인들에게 공명선거를 말할 수 있는가. 이제 한국교회의 하나님나라 척도는 신앙심이 아니라 헌금의 액수이다.

그렇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니 한국교회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돈(맘몬)이다. 어느 목사는 어느 방송설교에서 “철학자가 말하듯이 아는 것(지식)이 힘이 아니고, 율리우스 시저가 말한대로 군대가 강한 것도 아니다. 처칠이 말하듯이 대통령이 강한 것도 아니다. 오직 돈만이 강하다. 로마의 장군 시저도, 프랑스의 나폴레웅도 사라졌지만 돈의 능력이 사라진 적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만 있으면 물질적인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등진 개신교회, 미래가 암울하다”
가난한 자는 교회에 다닐 수 없다 … 교회의 신뢰성 상실


오늘 참담한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설교 내용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그렇다 돈이 있어야 총회장과 같은 명에도, 권력도 살 수 있다. 돈이 있어야 가난한 자를 돕고, 교회도 짓고, 선교도 할 수 있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돈만큼 강한 것은 없다. 하나님이 전능하듯이 돈도 전능하다. 때문에 ‘돈’, ‘맘몬’이 곧 하나님인 것이다. 즉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돈’으로 대치시킨 것이다. 가난이 ‘죄’라는 목회자도 있다. 돈만 있으면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도 살리고, 죽음 앞에 선 환자도 생명을 연장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이나, 그리스도인이나 전지전능한 것은 ‘돈’이라고 말한다.

더 이상 한국교회 희망 없다.

이 목사는 “봉사하는 교회의 교인들도 모두 부자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바란다”고 선언한다. 가난한 지역의 교인들이 좌절하고 괴로워하는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자가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친히 경험하게 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가난에 찌든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어 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정직한 목회자의 설교이다. 하지만 이 설교를 자세히 들여다가 보면, 가난한 사람은 교회를 다닐 수 없다는 말로 들린다. 오늘 맘몬에 길들여진 교회를 대변하는 설교로 들린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오늘 한국교회는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장애인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교회를 등진다. 과거 가난하고 소외된 노동자와 도시빈민들은 종로5가를 찾아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행동했다. 교회가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하면서, 명동성당을 찾았다. 명동성당마저 이들을 버리면서, 조계종을 찾았다. 하지만 맘몬에 길들여진 오늘날 종교단체 모두는 이들의 외침을 외면했다. 그러면서 기독교를 비롯한 불교 등 종교인 수는 크게 줄어들었다. 기독교는 1989년 교인수 1300만명을 정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해 지금은 700만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오늘 한국교회가 희망이 없다는 말로 들린다. 일부 대형교회의 담임목사 세습, 일부 목회자들의 윤리적 타락, 교회 내부의 다툼 및 폭력사태가 언론매체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교인들은 물론,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 교인들은 교회의 잘못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스스로 교인이기를 포기한다. 사실 초기 개신교회는 새로운 나라를 갈망했던 한민족에게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주었다. 또한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나라의 독립과 민족해방이라는 희망을 주었다. 6.25 한국전쟁 이후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소망도 주었다. 이러한 개신교회가 오늘 왜 이렇게 참담하게 되었는가(?) 그리스도인 모두는 묻고 있다.
부활주일 예배 후 일일노동을 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킥써비스 노동자는 점심식사를 하면서 부목사에게 “한국교회 희망 있습니까?”하며, 물었다. 부목사는 한참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교인 한사람이 끼어들어 “희망 없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마지막 희망은 “예수님께서 그랬듯이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 그곳은 분단의 현장이다”고 말했다. 노동자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모두가 말을 잊지 못했다.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렇다 이 대화처럼 오늘 한국교회는 한마디로 희망 없다. 곳곳에서 “돈!돈!돈! 돈의 돈!돈! 악마의 금전”소리만 들려온다. 십자가 탑을 높이는데 교회들 사이에 경쟁을 벌이고 있다. 교회마다 교회의 고유권한을 상실하면서 재산을 둘러싸고, 담임목사와 원로목사, 세습을 둘러싸고, 담임목사 청빙을 둘러싸고, 담임목사의 이단성을 둘러싸고 다툼이 끊이지를 않고 있다. 이 다툼으로 인해 교인들이 드린 하나님의 헌금은 변호사비 등으로 새어 나가고 있다. 돈 있는 자만이 법적 다툼도 벌일 수 있다.

최근 다툼을 벌이고 있는 서울교회를 보라. 지교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입장에 있는 총회장이 한쪽 편을 들어 발언해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이에 원로장로회와 시무장로, 교인들은 “총회장이 교회의 진상을 물론, 교회 문제해결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교회를 파행으로 몰고가는 행동이다”고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 지적은 지교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의지를 보이지 않는 이 교단의 임원회를 향한 호소로 여겨진다. 이밖의 교단의 임원들도 마찬가지로 교인들의 뜻을 반영해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

돈의 위력 어디까지

한국개신교와 세계에서 ‘돈의 위력’은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노동법 개악으로 노동자의 절반이상이 비정규직으로 전락했고,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비정규직으로 가난해진 사람들에게 신용카드를 발급해 소비를 진작시켜 경제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 결과 400만명이 신용불량자가 됐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은 부정과 부패로 국민들의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이로인해 가난한 사람들과 청년실업자들은 자신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들이 하나님의 전능성을 통해서 부자가 될 수 있다면, 그들은 얼마나 행복하고 돈의 힘에 대해서 감사할까.

오늘 한국개신교회의 모습은, 무능력한 목회자라도 큰 교회 부자 아버지를 만나서 교회를 그대로 물려받으면, 그는 능력 있는 목회자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교회의 능력 있는 부목사와 장로들은 그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가 된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성실해도 돈이 없으면 상놈이다. 공부를 못하고 근면하지 못해도 돈이 있으면 양반이다. ‘신분’이 사람을 만드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요즘 시대는 돈이 사람을 만든다. 푼돈을 받은 정치인은 철장신세를 지지만, 수백억원을 정치자금을 준 기업인들은 자유롭다.

개신교회를 보라. 지금까지 목회자들이 돈을 주고받아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때문에 단체 발전기금을 마음대로 써도 그냥 넘어간다. 그리고 선거 때 1600명의 총회원에게 10억원 이상을 선거자금으로 살포하고도 자유롭다. 감독회장 선거에서 어마어마한 금전살포를 해도 누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법적인 제제를 받지 않는다. 또한 법적 다툼에서 정치적 실세에게 돈을 주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를 않는다. 이단성의 문제가 있는 목사가 이단사이비대책위원들에게 돈만 주면 이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돈을 안주면 이단이 된다.

이것이 바로 중세교회를 닮아가는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개 교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장로를 만드는 것도 신앙이 아니다. 돈이다. 아무리 신앙이 돈독하고 오래 동안 교회에 다녔어도 돈이 없으면 장로가 못된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개혁과 변화를 위해서 앞장선다는 한국기독교장로회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지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그렇게도 배척했던 돈(맘몬)이다.

예수님은 재물(맘몬)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수 없다고 선언했다. 하나님과 재물이 양립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예수님은 이미 유대교에서 사제들 가운데 돈이 어떤 위력을 가졌는가를 보았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장 24절),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누가복음 13-14절)

이러한 예수님의 선언은 예수님 당시나, 그후 교회의 역사에서 돈을 사랑하는 성직자들에게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교회는 역사적으로 항상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기며, 하나님을 호화로운 성전에 가두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하나님 보다 맘몬을 더 섬기려 한 것이 교회의 역사이다. 오늘 중세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한국개신교회를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교회마다 돈의 소리가 들리며,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한국교회의 곳곳에서 악취가 풍긴다.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단도직입적는 선언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당황스럽고, 염려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맘몬에 얽매이지 말고, 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마태복음의 선언이 가능한가.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의 내용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청지기는 주인으로부터 해고를 당했다. 그러자 청지기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자를 불러 채무를 탕감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친구로 삼았다.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를 이렇게 준비했다.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못 섬긴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누가복음 16장 1절-13절)

이 성경구절에서 청지기는 자신에게 영리한 행동을 했다. 반대로 주인에게는 불리한 행동을 했다. 과거 많은 성서해석자들은 이 비유를 도덕적인 테두리에서 해석하려고 했다. 맘몬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기독교회의 입장에서는 당연했다. 그래서 독일의 신학자 드레브만은 “이 비유를 비유들 가운데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행위는 과거나, 지금이나 사회통념상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것은 청지기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을 고용해 준 주인을 기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시대의 전환,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알고, 영리하게 행동헀기 때문에 칭찬해 준 것이다. 이 비유는 또 맘몬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오늘날 한국개신교를 향한 말이기도 하다. 많은 성직자들이 “자신은 무소유자”라고 아무렇지 않게 교인들 앞에서 설교한다. 그러나 이들의 내면을 살펴보면,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무소유를 말하면서 교회의 재산을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하고, 이를 둘러싸고 다툼을 벌이는 성직자의 모습은 한마디로 이 비유에서 주인을 기만한 청지기와 같은 사람이 아닌가.

그 시대적 전환은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는 요한까지이며, 그 뒤부터는 하나님의 복음이 밀고 들어오는 시대이다. 이것을 모르는 바리사이파(유대인)는 이 시대의 전환을 알지 못했고, 전통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다 오늘 한국교회는 교회의 재산사용 문제에 있어서 전통적인 도덕적 준거에서 벗어나, 하나님나라의 질서에 대응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호화로운 교회당에서 신(하나님)을 해방시켜야 한다. 맘몬으로부터 자유로운 성직자로 거듭나야 한다. 이 때 비로써 한국개신교는 한민족에게 희망의 종교로 거듭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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