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숲

미세먼지 때문에 눈이 아프다고 불평
목도 아프다고 투덜투덜
폐도 숨 막힌다고

내 안에 숲을 만드니
눈이 녹색 잎 보며 총총
목과 폐에 맑은 공기가 슬슬 들어가고
몸은 덩달아 덩실 덩실

내 안의 숲이여
시나브로 푸르러지거라

 『조선문학』 2018년 3월호에서

* 김형애 시인:
 『조선문학』 시인상. 시집: 『시가 있는 페치카』, 펜문학상(수필), 연세의료원 행정실정(역)

▲ 정 재 영 장로
형식상에서 보면 형이상시의 특성인 상반된 이미지를 설치하고 있다. 첫 연은 공해로 찌든 인간 모습을 뜻하고, 2연은 숲으로 건강해진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자연이 주는 환경과 마지막 연에서 연약해진 인간의 고통은 외적인 요소가 아닌 내적인 요소로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설득하고자 함이다.

 그럼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미세먼지로 은폐시킨 외부적인 요소란 무엇일까. 사람마다 각각 다르겠지만 인간의 원초적 부패성(원죄)이 만든 모든 행위를 총칭해도 해석이 되는 개연성을 가진다. 내 안의 숲도 마찬가지다. 인간을 치유할 수 있는 모두를 대입해도 된다. 왜냐면 시란 추상화처럼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세먼지가 주는 유해성을 단지 육체적 고통으로 한정해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정신적인 부분에서 미세먼지의 의미를 유추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내 안에 존재하는 숲은 정신적으로 영향을 주는 불가시적인 존재다. 그 존재는 시인 안에 간직하고 있는 진리의 신념(신앙)일 것이다. 

 시나브로란 말은 시간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으로, 성장성을 함축하고 있다. 완성된 사물이 아니라 시간에 의해서 자라는 요소라는 암시성을 내포하고 있다. 만일 숲을 신앙대상자로 해석하면 모순에 빠진다. 신앙대상자는 본질적으로 절대자이며 완전자다. 성장이 필요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숲이란 그 대상자가 준 진리의 숲으로 이해하는 편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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