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고 현 목사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고 선언하셨다.(마태복음 5장 3절) 그렇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살기 때문이다. 사실 마음을 비우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행복해 보인다. 욕심과 탐욕을 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음의 가난’을 예찬하면서도, ‘육신의 가난’을 피하고 싶어 한다. ‘육신의 가난’을 피하는 사람은 마음을 비우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탐욕과 욕심으로 가득차 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자랑할 것도 아니다.

헌데 세상의 가난하게 산다고 하는 사람, 무소유로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자랑하며, 자신만은 탐욕과 욕망에서 벗어났다고 자신을 자랑한다. 여기에서 무소유를 주장하는 일부목회자들의 모습을 보면, 악취가 풍긴다. 이들의 일부는 은퇴할 무렵,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지를 못해 교인들과 다툼을 벌인다. 법정 소송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이 목사가 평소 무소유를 주장한 사람인가를 의심하게 한다.

분명한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육신의 가난’을 피하고 싶어 한다. 어느 목사는 교인들에게 ‘가난한 것도 죄’라고 설교한다. 그러면서 ‘축복 받으라’고 한다. 복! 복! 복!을 외친다. 그래서 기독교는 한국에서 만큼은 복을 받는 종교가 되었다. 그리고 육신의 가난에서 벗어난 교인들은 감사헌금을 드린다.

모든 종교는 복의 종교이며, 신비주의적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복!복!복!을 외친다. 드린 만큼 복을 받는다는 설교도 한다. 이는 곧 성공주의를 넘어서는 ‘성공우상화’로 가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난한 사람은 교회 안에서 설자리를 잃어버린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제 가난한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를 찾지 않는다. 교회에 나가 봐야 변두리를 맴돈다. 이것은 교회마다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때문이다. 어느 교회는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 목사님을 모시고 사업 성공예배를 드리라고 부추긴다. 여기에는 여전도사들과 권사들이 한 몫을 한다.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문제는 예배 권유 뒤에 꼭 따라 붙는 것이 있다. 목사님을 모시면 감사봉투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감사봉투는 많을수록 좋고, 그만큼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보아도 무당이 ‘굿’을 하고, 복채를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성공주의를 넘어서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가 말한 ‘성공우상화’로 나가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이 때 크게 성장했다. 이제 한국교회는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참된 신앙인이라면 육신의 가난은 하나님을 갈망하는데 도움이 되면 되었지, 가난 그 자체를 비참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으로 그 영혼을 가득 채우려는 심령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육체적인 가난은 결코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예장 보수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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