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중세에는 신학과 기독교적 윤리가 사회적, 경제적 삶을 결정지었다. 인간은 종교적 구원, 영원한 나라에서의 삶이 궁극적 목표였다. 때문에 인간의 지상에서의 경제적 삶, 그것을 위한 질서는 잠정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것은 이래도, 저래도 좋은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종교적 질서가 세속적 삶이나, 경제적 필요에 선행했다. 경제적 사고는 전적으로 종교적 질서, 즉 종교적 가치와 관습에 철저히 종속되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그의 소명을 직업과 연결시킴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경제적인 삶을 포괄하는 삶 자체가 구원을 위한 소명과 연관되어 있음을 밝혔다. 루터는 천상의 삶을 궁극적 실제의 삶으로 파악하고 현세적 삶을 지나가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차안의 삶이 피안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한대로 지상에서의 삶이 천장에서의 삶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직업은 지상의 삶에서 중심을 이룬다. 직업을 신의 소명과 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라는 것이기도 하다. 중세의 사고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과거의 전통적 속박에서 벗어나 미래 지향적인 사고를 갖기 시작했0다. 천상을 향한 삶에서 지상적이고, 현실적인 삶으로 그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종교적 기도의 세계에서, 현실적인 기도와 노동의 세계로 나온 것이다.

그것은 개신교의 창시자이며,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나, 요한네스 칼뱅에게서도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다. 칼뱅은 “직업적 삶의 성공은 곧 종교적 예정의징표”라고 했다. 그는 이중 예정론을 통해서 “인간은 전적으로 신에 의해서 구원으로 예정되거나, 아니면 멸망으로 예정된다”는 것이다. 칼뱅이 주장하는 예정 혼은 선책은 전적으로 신의 섭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만, 부수적인 표징을 통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정을 신의 영원한 의지의 결정이라고 부른다. 그것에 의해서 그는 그의 뜻에 따라 각 사람에게 일어난 것을 스스로 경정하신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동일한 조건하게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어떤 이는 영생으로, 어떤 이는 영원한 형벌로 예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창조되었으므로 우리는 이 사람이 생명으로 혹은 죽음으로 있다고 말해야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거는 신자의 근면성, 세계 내적 금욕주의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축적된 부에 두고 있다. 이 요소들은 자본주의 정신을 발현하게 하는 개신교 윤리의 기초가 되었다. 성공적 직업 활동이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기여하며, 따라서 세속적 합리성과 종교가 이전처럼 대립되지 않는다. 세상에서 경제활동의 기초가 곧 종교적 논거와 함께 종교적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것의 목표는 개인의 종교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의 결합이다.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해방은 일차적으로 종교적 자유에서 출발하며, 나아가 정치적 이유까지도 지향하는 것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자유주의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보다 종교적 영역에서의 해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철학에 나타난 새로운 윤리적 사상 체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는 또 분열과 갈등에 빠져 있던 영국교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