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종 문 목사

복음은 예수님이 실현한 아가페 사랑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복음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주인으로 삼는 나라,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다스리는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이다. 결과적으로 복음의 중심은 아가페 사랑, 조건없는 사랑이다. 그래서 목회자는 이 사랑을 전하기 위해 오늘도 몸부림을 친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과 탐욕, 그리고 분열과 갈등으로 가득한 오늘의 역사가 존속하는 한 복음의 사랑이, 법을 대신 할 수 없다. 사회를 존속하기 위해서는 강제적인 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법만으로 안된다. 법은 악의 도구로 전락하기 쉽다.

법은 억압과 수탈의 도구로 전락하거나, 법이 아무리 완벽하다고 할지라도, 악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법만으로 인간에게 자유와 사랑의 기쁨, 삶의 질을 높여 줄 수 없다. 법이 억압과 수탈의 도구로 전락하거나 그 자체를 절대화함으로써, 사람들은 그 체제에 예속되기 쉽다. 법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실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법은 인간의 자유와 사랑의 기쁨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삶의 주체성을 가져다가 주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법이 소수의 강자를 더욱 강력하게 하고, 다수의 약한 자를 더욱 무력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면, 지탄을 받아야 마땅하다. 당연히 폐기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법은 인간위에 군림해서는 안된다. 법 그 자체는 법을 위해 있지 않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 하나님의 나라, 자유와 사랑, 평등이 넘치는 그의 나라를 위해서 있다. 때문에 법은 사회와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고 개혁되어야 한다. 분명히 법은 사람을 위해서 있다. 예수님도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말하면서, 이 법들은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했다. 그렇다 모든 법은 사람을 위해서 있다.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는 이와는 달리 다른 사실을 말해 준다. 잃은 양 한 마리를 다른 아흔아홉 마리로 대체할 수 없다. 목자는 잃은 양 한 마리에 모든 것이 걸려 있듯이 행동한다. 그러나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은 목자는 어깨에 메고 돌아와 벗과 이웃을 불러놓고 “다 함께 즐거워 하자. 잃은 양을 찾아노라”고 말하며, 기쁨의 잔치를 벌인다. 값으로 따져서는 목자의 기쁨을 알 수 없다. 소외된 인간 하나를 만나는 기쁨은 소외되지 않은 아흔아홉으로부터 얻은 기쁨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정치적 사고나, 법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에 대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한 마리의 양을 소중하게 여기지를 않는다. 그렇다보니 목회자와 교인, 장로와 교인, 교인과 교인 간에 양분되어 끊임없이 다툼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교회간, 교단간, 연합단체간 다툼이 끊이지를 않고 있다. 그것도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실현해야 할 교회에서 이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상의 어떤 혁명도, 운동도, 개혁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도외시키고는 성공할 수 없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서 서광이 열린다. 이제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잃은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예장 통합피어선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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