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이 핵 위기를 극복하고 완전한 해빙무드로 갈 것인지 온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지난 27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됐다. 남북 정상회담이 북한이 아닌 판문점 우리 측 평화의 집에서 열렸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과거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 평양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러니까 북한 정권의 수반이 남한 땅을 밟은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판문점은 민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의 시작이자 끝을 상징하는 장소이다. 북한이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하면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고, 1953년 7월 27일 이곳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됨으로 전쟁의 포성이 멈췄다. 그런 의미에서 판문점은 21세기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은 냉전의 상징물이나 마찬가지이다.

판문점은 고려시대부터 “널문(널판지로 된 문) 마을”로 불리던 곳이다. 1951년 10월 28일 한국전쟁 휴전회담 장소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회담에 참가하는 중공군 대표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부근에 있던 주막을 겸한 가게 이름을 ‘판문점’(板門店)이라고 한자로 표기한 데서 유래한다. 그 가게 문이 나무 판자여서 ‘판문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군사분계선인 이곳이 한때 남북한 병사들이 자유롭게 대화하고 왕래하기도 했던 곳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곳에서 남북한 병사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나란히 벤치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었다. 적어도 1976년 8월 18일 이른바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북한의 도끼만행사건 이후 이곳 ‘자유의 다리’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되어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도는 긴장의 땅이 되고 말았다.

민족 분단의 상징이던 판문점이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화해와 평화의 상징으로 변모하기까지 남북한은 이곳에서 수없이 만나고 돌아서기를 반복해 왔다. 남북한은 1971년 9월 이곳에서 적십자예비회담을 가지면서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다. 이후 1980년대 들어 남북 총리회담을 시작으로 경제회담, 국회회담, 수해물자 인도·인수를 위한 적십자 실무접촉, 이산가족 고향 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 등 무수히 많은 만남이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 속에 각인된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은 1998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두 차례에 걸쳐 소 떼 1001마리를 몰고 이곳 판문점을 거쳐 북한을 방문한 일일 것이다. 당시 미국 CNN방송이 이 장면을 생중계하면서 전세계인에게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남북정상 간의 만남이 완전한 한반도의 평화로 뿌리내리기까지는 아직도 넘어야 산이 많이 남아있다. 북한은 남북관계에서 늘 냉온탕을 옮겨 다녔다. 한쪽에서는 평화를 말하면서 다른 쪽으로는 끊임없이 무력도발을 감행해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에 이어 2002년 제2연평해전을 일으키고, 2010년에는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7천5백만 겨레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러던 북한이 갑자기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연이어 대화의 장으로 나와 핵실험 중단과 핵실험장 폐기같은 카드를 먼저 꺼내드는 것에 대해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의심과 긴장을 끈을 풀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저들이 남북관계에서 매번 손바닥 뒤집듯이 신뢰를 깨 온데 대한 우리 국민의 트라우마가 얼마만큼 강한지를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옛말에 “첫술에 배부르랴”라는 말이 있다. 그렇듯 65년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판문점에서 남북정상이 역사적인 첫 만남을 가진 것만으로 벌써 배부르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가 헤브론에서 만나 서로의 가슴을 열었듯이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마주잡은 두 정상의 굳은 악수가 이 땅의 전쟁을 끝내고 화해와 평화를 시작하는 새로운 마중물이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만은 7천5백만 민족 모두가 똑같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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