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루터가 담대하게 보름스의회 앞에서도 비굴하게 처신하지 않고, 세속의 최고권위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죄에 대한 사면권에 있어서도 최종 권위가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성경에만 의존하는 참된 신앙으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터득했다. 그는 오랫동안 성경을 읽고 강의하면서 고민했던 주제에 대한 해답을 터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루터가 95개 조항을 게재하던 시절에는 에르푸르트 어거스틴파 수도원에서 습득한 것들, 하나님의 은혜와 값없이 주시는 믿음의 선물에 대한 확신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존하는 최고의 믿음을 추구했고, 여전히 젊은 열정과 힘차게 밀고 나가는 추진력을 보여줬다. 1507년에 신부로 서품을 받았고, 그 이후에도 철저하게 로마가톨릭의 규칙을 지켜왔었다. 1508년에는 신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비텐베르그 대학의 교수로 부임하게 된 것도 그의 스승 요한 슈타우핏츠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야심에 찬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1502년 새로운 대학을 비텐베르그에 세우고, 거대한 성벽 교회를 지으면서 슈타우핏츠를 학장으로 초빙하였다. 비텐베르그 대학에 오게 된 루터는 어거스틴과 초대 교부들의 글을 읽으면서도 주로 스콜라주의 신학을 가르쳤다. 점차 루터는 성경 연구를 통해서 복음을 확고하게 붙잡게 되었다.

생애 전체적으로 볼 때,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성장한 루터는 죄와 더불어 사투하는 영적인 투쟁을 경험했다. 완전주의를 지향하는 수도원의 규칙을 준수하였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심판을 무서워하는 경건한 염려가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절망에 빠져 있었다. 의인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하게 살려면 얼마나 선행을 해야만 만족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기준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어거스틴의 책에서 율법과 복음, 죄와 은총의 대립적인 구조를 이해하게 되었다. 1513년 시편을 강해하면서, 서서히 하나님의 뜻을 파악할 수 있었고,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언젠가 루터는 수도원의 종 탑 속에 들어가서 그동안의 의문을 풀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루터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탑 속의 체험”에 대해서 정확한 연대를 추정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1519년 말에 카예탄과 논쟁을 벌이고 난 후가 아니었을까 추정한다. 1545년 죽기 바로 직전에 루터는 자신의 탑 체험에 대해 언급하였다. 아마도 에르푸르트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가졌던 말씀에 대한 명상과 기도시간이었으리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루터는 절망적인 인간의 죄 문제에대해서 성경으로부터 확신을 갖게 되었음을 강조하였다. 로마서 주석 서문에서 루터는 바울 사도로부터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뿌리가 깊은 것인가를 배웠으며, 하나님의 사죄하는 은총이 얼마나 광대하시다는 것을 터득했다고 밝혔다. 즉 로마서 1장 17절은 로마서 3장 24절에 나오는 진단과 연계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언급하였다. 의인이라는 선언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으로 의로움을 채워간다는 것이 아니다. 의롭게 되어간다는 해석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고 간파해낸 것이다. 의인이라는 것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법정적인 선언이다. 이 본문의 의미를 깨달은 후에, 즉각적으로 루터는 천국과 구원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서구 유럽은 기독교 국가로 살아왔지만, 로마가톨릭교회가 가르쳐준 진리체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생생하게 전달하지 못하였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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