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동 원 목사

예수님은 우리가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을 생활로 보여주셨다. 정체성과 본질을 상실해 가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는 성서로 돌아가야만, 잃어버린 교회의 정체성도, 그리스도교의 본질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을 그의 삶을 통해 배우고, 따른다는 것이다. 그것의 하나는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더불어 산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고난에 참여하는 ‘더불어 수난 당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공로를 인정한다. 그러나 루터의 ‘두 나라설’은 독일의 나치스의 횡포와 그리스도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두 나라설’은 종교개혁의 다음 단계를 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사회개혁과 정치개혁, 그리고 문화개혁이 동반될 때 가능하다는 것을 망각했다. 분명한 것은, 종교개혁은 자기개혁이고, 자기에 대한 저항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프로테스탄트에 담긴 저항이란 뜻에서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스위스의 구테르와 라가츠는 자본주의 사회체제에 대한 냉혹한 비판과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종교라는 탈을 씌워 인위적 성역에 가둠으로써 결국 사회는 무신 세계화되고, 맘몬이 판을 친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보고 비판했다. ‘하나님을 독점화’ 시킨 교회의 모순을 공격한 것이다. 맘몬과 바벨에 길들여진 한국교회, 하나님을 독점화하기 위해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어버린 오늘 한국교회를 향한 지적이 아닌가 싶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나라운동이 아니다.

하나님나라 선교의 무대는 교회만일 수 없다. 세상전체가 하나님 나라 선교의 현장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혼자갈 수 없다. 모두가 함께 가야 한다. 기독교가 크게 발전한 남한의 민족만이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북한동포와 함께 가야 한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세력을 정복한 승리자이다. 그런 전제 아래서 정치, 경제, 사회체제의 악에 대해서도 승리해야 한다. 이것이 신학적 정초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로 단순히 내적이거나, 피안적인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실현되고 있다. 부활의 예수님은 피안으로 간 것이 아니라, 바로 사회 안에서 승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사회현장에서 그의 승리를 보고 거기에 참여해야 한다”고 독일의 부름하르트 부자는 감상적이고, 추상적인 하나님나라를 부정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종교가 아니다.

종교개혁은 사회개혁과 동반될 때 완성된다. 독일의 나치스 정권을 그대로 두는 한 무엇이든지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던 본회퍼는, 감옥 안에서 “하나님 없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살인범, 절도범, 사기범 등이 감옥에 가지전, 상상했던 것처럼 질적으로 약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고 경건한 자세와 용어만 골라 쓰는 교회 안의 사람들보다, 저속하다고 볼 아무런 근거도 없는 그들 나름의 성실성과 존엄성, 그리고 남을 위해 일하는 인간애가 있다는 사실이다.

본회퍼는 이들이야 말로 예수님이 싸고돌고, 예수님이 좋아 밤낮으로 쫓아다니던 그 갈릴리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동일한 그 사람들! 예수님은 이들을 무조건 받아들였다. 누가 저들을 정죄할 것인가. 교리인지, 교권인지 본회퍼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이들도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본회퍼는 신학자로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이며, 백성이라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본회퍼는 신학적 근거를 바울에게 두고, 루터에게서 종교개혁의 무기가 되었던 ‘의인론’이 무기가 되었다. 이것은 죄인이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범인 그대로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결국 이들도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신을 성전 안에 가두어 둘 수 없다. 신의 이름이 우리의 돼먹지 않은 지식을 보관하는 구멍가게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성전에 갇힌 하나님을 이제라도 세계로 불러내야 한다.

기장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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