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중 곤 목사

오늘 한국교회의 십자가는 없는 곳이 없다. 큰 도시는 교회당이 구멍가게처럼 많아졌다. 거대하고 화려한 교회당이 경쟁적으로 세워지고 있다. 하지만 교회에 대한 신용과 기대는 과거와 갖지가 않다. 겉은 요란한데 속은 비어 있다. 또 교회가 있어야 할 곳에 교회를 세우지를 못했다. 여기에다 맘몬과 바벨을 쫓던 교회들이, 전도의 문이 막혀 교회의 문을 닫고 있다. 교회는 무엇이고,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제라도 목회자인 우리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의 토대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웠다. 박재순 교수는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했다. 첫째 예수님의 삶은 죄인들과 사귀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 병든자, 불구자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선언했다. 예수님은 지위와 신분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사귀고,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오늘 교회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교회 내부를 들여다가 보면, 가진자는 가진자들 끼리, 가난한자는 가난한자들 끼리, 노동자는 노동자들끼리, 의로운 사람은 의로운 사람끼리 모인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없다. 맘몬과 바벨에 길들여진 목회자들은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데 급급하다.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편안하게 교회에 나올 수 없다. 교회의 문턱은 점점 높아져서 교회는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서로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받아드릴 수 없다.

그렇다 보니 교회에서 소외된 노동자, 가난한자, 불구자들은 교회를 떠난다. 오죽하면 이들만을 위한 민중교회가 생겨나겠는가. 예수님은 분명하게 이들의 ‘삶의 현장’에 계셨으며,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셨다. 그리고 맘몬과 바벨을 멀리하시고, 이들을 향해 “너희들이 천국에 먼저 들어간다”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회적으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또한 예수님은 항상 잃어버린 자와 소외된 자를 찾아 나섰다. 그것은 잃은 양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다. 목자는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아흔아홉마리를 들판에 그냥 놔두고, 한 마리를 찾아 가시밭길과 벼랑을 헤맨다. 이것은 합리적인 계산을 뛰어 넘는 초월적인 사랑이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해야 한다”는 사고는 목자의 행동이 아니다. 잃어버린 한사람을 버릴 수 있는 공동체는 아흔아홉 사람도 버릴 수 있다.

한사람의 아픔에 동참하지 않는 공동체는 죽은 공동체이다, 무능한 인간, 소외된 인간을 얼마나 잘 돌보느냐에 따라 그 사회와 교회의 성숙도를 가늠할 수 있다. 헌데 오늘 사회와 교회는 그렇지 못하다. 오늘 교회와 사회는 장애자, 고통받는 사람들을 감싸주지를 못한다. 이들을 방문해 몇푼주고 사진을 찍는 것으로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들을 안아주고, 우리가 이들을 구원한다기보다 오히려 이들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버려진 인간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완성된다. 버림받은 자들의 고통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다. 이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의 구원이 이루어진다. 교회는 잃은 자에 대한 초월적인 사랑에 근거한 공동체이다. 이러한 교회는 사랑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그리고 평등의 공동체를 실현하는 공동체이다. 언제나 잃은 자를 찾아 나서는 교회, 잃은 자를 찾았을 때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열정이 식은 교회, 자기들 가운데 안주하는 교회, 장애자를 비롯한 걸인, 고난당하는 자들을 외면하는 교회는 닫혀진 교회이며, 죽은 교회이다.

예장 합동총신 총회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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