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성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다. 그것은 이집트 파라오 밑에서 핍박을 받으며, 고난당한 조상들을 기억하라는 교훈이다. 우리조상들도 조선시대와 일본식민지 시대, 6.25 한국전쟁, 해방후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고난을 다하며, 민족의 앞날을 걱정했다. 문제는 이렇게 고난을 당한 우리의 조상들과 부모들의 설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계약이며, 약속이다. 그런데 계약을 지키며 행동하는 기독교인들은 그리 많지 않다. 생각해 보아도 얼마 없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을 핑계로 웃어른에 대해서 무관심 하다. 어느 교회는 웃어른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 ‘우상’으로 매도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부모는 길삼해서 자식들에게 옷을 입혀주고. 농사를 지어 생명의 밥을 지어 주었다.

급속하게 변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대가족제도, 핵가족제도를 넘어 1인 가족제도로 바뀌고 있다. 그러면서 어르신들에 대한 ‘효의 사상’은 실종되고 있다. 부모만큼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대안은 없다. 그런데 부모의 재산을 노린 존속살인사건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어른들의 축제인 어버이 날은 갈수록 부모들에게 최악의 날이 되고 있다. 그것은 모 기관의 의식조사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이 기관의 의식조사에 의하면 청소년의 74%가 부모를 모시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고령화시대로 치닫고 있는 우리사회에서 노인문제의 심각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사실 혼자의 힘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면서, 가족의 생활공동체는 깨지고 있다. 어버이의 날 시부모에게 전화를 걸지 않아 시부모로부터 꾸중을 들은 것이 화가 나 “이것이 며느리가 야단맞을 일이냐”며, 언론사에 전화를 걸어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며느리의 모습은 평등의 생활공동체인 가족의 관계가 깨지고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그리고 ‘효의 종교’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이를 망각하고, ‘바쁘다’는 이유로 효의 사상을 실종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스도인 모두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이유로 ‘제 잘난 맛’에 사는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비소를 보내고 있다. 일부의 기독교인들도 심할 정도로 부모를 아무렇게 방치해 이웃사람들의 빈축을 사고 있다. 그러면서 주일날 성경책을 옆에 끼고 교회에 간다. 세상 사람들은 이 모습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식적며,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모습은 오늘 한국교회를 엉망진창으로 만들r고 있다. 기독교의 정체성을 뿌리채 흔들어 버린다. 이같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 모두가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이유는 ‘신앙’을 앞세운 나머지 가족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기독교는 일부목회자와 교인들의 잘못된 교육과 행동으로 인해 ‘부모도 몰라보는 종교’가 되어 버렸다.

이에 대해 일부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결여된 ‘효의 사상’에 대해서는 반성하지를 않고, 세상 사람들이 마치 자신들을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본다고 불만 아닌 불만을 털어놓는다. 또 핍박으로 여긴다. 그렇다고 한국교회 전체가 효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한국교회 만큼 ‘효’를 강조하는 종교단체도 없다. 실종된 ‘효의 사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전문대학원까지 생겼다.

십계명 중 제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할 정도로 기독교와 효는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다. 이것은 기독교가 유교의 ‘효의 사상’보다도 더 강조하는 것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부모의 대표자적 권위는 신적인 권위이며, 무너뜨릴 수 없는 권위이다. 하나님은 사회와 국가에 기본 단위인 가정의 권한을 부모에게 완전히 위임했다. 결국 부모는 주안에서의 권한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위의 상징이다.

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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