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사람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축복해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을 거부했다. 여기에 예수님은 노하면서,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막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의 것이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어린이로 삼는 말로 “누구든지 한 어린이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다.

여기에 나오는 ‘어린이와 같이’란 어린이의 윤리나, 도덕성이 아니다. 종교성도 아니다. 효용성도 아니다. ‘어린이’라는 것 자체가 그대로 인정된 것이다. 새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전형적인 기준으로 인정한 것이다. 어린이는 사회적 약자로 바리새체제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어린이들은 바리새체제에서 계율을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성인들은 어린이를 멸시했다. 이러한 어린이가 새로운 가치의 기준이 된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또는 어린이 자체의 가치 기준은 그 자체에서 가치를 찾는 것이 아니라, 효용가치를 찾게 된다. 오늘 한국교회가 갈수록 어린이 선교를 몰각하고 있는 것은, 어린이들이 교회재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못하고, 경제적인 투자만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국교회가 ‘물화’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교회가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 교회의 존재에 대한 보람을 느끼고, 교회의 가치를 찾고 있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아니 국민들의 가치관은 한마디로 ‘부강’이다. 그것은 재력과 권력이다. 그리스도인이나, 국민들은 여기에 바탕을 두고 실리와 실용을 찾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실용은 몰 윤리화의 길이다. 그러면서 우리사회는 경제적으로 넉넉해졌다. 어린이들을 기준으로 하는 가치를 상실해 버렸다. 어른이 어린이에게 해야 할 어떤 제시도 없다. 단순히 아래에서 위로 향해야 할 의무만을 강조한다.

오늘 교회나, 사회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러한 모습을 종종 본다. 부강을 목표로 삼고 있는 국민의 가치 속에서 누가 전화 한 통화에 수천만원을 뇌물로 제공한다는데 마다 할 사람이 있겠는가. 돈을 주고, 직장도 사고, 돈으로 선생님도 된다. 계산상 손해 볼 일이 아니다. 어린 소녀들이 계엄군에 의해 농락을 당했는데도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법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충효만을 강조할 수 있겠는가. 어린 아이는 부모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글자 그대로 성인 폭력시대이다.

성인은 충효대상이고, 의무는 없는 결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겠다고 하겠는가. 그들이 또 교회에서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 휴머니스트 카뮈는 “나는 여러분과 함께 악을 미워하지만, 희망을 가지지는 않는다. 나는 어린이들이 괴로워하고 죽어가는 이 세상과 맞서서 싸우겠다. 세상이 그리스도인에게 기대하는 것은 ……추상적 관념에서 벗어나 피로 얼룩진 시대역사의 모습을 마주 보는 것이다. 법도 없고 곳곳에서 지칠 줄 모르고 어린이들과 사람을 위하여 몸을 내대고 있는 한줌 사람들의 외침에 온 세상 수백만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수백만의 소리를 합해야 한다”고 소리 질렀다.

폭정과 어린이 학대의 이야기는 성서에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어린이를 파라오가 학살한 이야기, 예수님이 태어났을 당시 헤롯이 어린이를 학살한 이야기 등등 … 정적의 씨를 없애기 위해 어린 생명들을 살해한 것이다. 어린 자식들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그들을 대신해서 아우성치는 세월호유가족들의 농성장을 ‘굿판’으로 비유하는 정치인의 모습은 무게의 중심을 이웃에게 두지를 않고, 무게의 중심을 자신에게 둔 결과의 발언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발언은 민족의 장래, 민족의 역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어린이는 어린이 다워야 한다. 그것은 무한한 가능성이며, 이민족의 희망이다.

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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