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시자 요셉의 형제들은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전에 자신들이 동생 요셉에게 행한 죄악으로 인해 보복당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창 50:15). 우리가 동료로부터 죄를 용서 받았을지라도 죄 자체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용서 받고 잊은 것 같았던 죄는 어떤 계기가 되면 되살아나서 보복의 두려움을 가중시키고, 마침내 더 큰 죄를 불러들인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죄가 다시는 되살아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요셉의 말에서 그 단서를 보게 된다.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창 50:20) 요셉은 형제들의 죄악을 자기가 용서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만백성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섭리로 말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신앙 안에서만 가능하다. 인간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다. 하나님 안에서는 인간의 죄악도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동인이 된다.

바울의 교회론도 여기에 정초한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유대인-헬라인, 종-자유인: 이는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교류할 수 없는 상극의 관계이다. 오직 서로를 향한 혐오와 배척만이 기억되는 관계이다. 이런 이들이 한 성령으로 세례 받고, 한 성령을 마시게 하심으로 형성된 게 바로 교회 공동체(에클레시아)이다. 하나님은 지난날의 모든 죄악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용서받고 새로운 관계로 살게 하신 것이다.

그동안 남과 북의 서로를 향한 적개심은 서로가 죄악에 대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철저한 보복을 다진 것은 남과 북이 다를 바 없다. 애당초 죄에 대한 인간의 용서는 제한적이다. 용서했다가도 다시 되살아나는 게 죄악이다.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용서뿐이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이다. 지금 남과 북은 분단 70년 만에 악을 선으로 바꾸는 실험을 하고 있다. 증오의 파국을 망각하고 판을 깨려는 수작들이 집요하지만, 이 절체절명의 기회를 살려 반드시 성공하도록 이 땅의 교회들은 함께 기도해야 한다.

삼일교회 담임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