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빛

아버지를 땅에 묻었다
하늘이던 아버지가 땅이 되었다

땅은 나의 아버지

하산하는 길에 발이 오그라들었다

신발을 신고 땅을 밟는 일
발톱 저리게 황망하다

자갈에 부딪혀도 피가 당긴다.

▲ 문 현 미 시인
1999년 시집『아버지의 빛』이 출간되었다. 이 시는「아버지의 빛」연작시 중 맨 처음에 실린 작품이다. 시집 후반부에 시를 위한 아포리즘 형식으로 <증오와 연민 사이에서>라는 제목 아래 짧은 단상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시인은 “내게 있어 시는 내 자전적 거울”이라고 토로한다. 본래 서정시는 시인이 대상에 대해 느낀 감정을 밀도 있는 언어로 고백하는 양식이다. 시인의 특별한 경험을 기억의 재구성을 통하여 압축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본질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시는 시인의 가족사 즉 아버지와의 구체적인 경험과 장례 후의 감정을 바탕으로 창작되었다.

시인에게 아버지는 하늘이었다. 하늘은 자식에게 어떤 대상인가. 그것은 항상 바라보거나 우러러보는 대상이다. 가까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이다. 그런 대상인 아버지를 땅에 묻었을 때 자식은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의 전율에 휩싸인다. 자식으로서 역할을 다 하지 못한 죄책감, 혹은 아버지를 원망했거나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의 응어리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져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슬프다거나 원망스럽다거나 하는 감정 대신 섬세한 서정의 압축으로 이별의 슬픔을 미학적으로 완성하였다.

하늘이던 아버지가 밟고 다니는 땅이 되었으니 얼마나 황망한 일인가. 그래서 하산 길에 발이 오그라들고 “신발을 신고 땅을 밟는 일/발톱 저리게 황망하다”는 시구가 탄생한다. 언어를 탁마하는 솜씨가 장인의 손길에 가 닿으니 시를 읽는 독자의 심경이 바닥을 알 수 없는 슬픔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특히 “자갈에 부딪혀도 피가 당긴다”는 마지막 시행은 내면화된 슬픔의 파장을 극도로 절제된 감정의 응축으로 표현한 명구이다. 이때 우리는 일인칭 고백의 특징을 지닌 서정시의 영역이 확장되어 가는 진경을 체험하게 된다. 현세에서 하늘이던 아버지가 소천 후에 땅의 아버지가 되어 자식에게 빛으로 함께 하는 큰 사랑이 울림을 준다. 유와 무는 서로 살게 해 준다는 有無相生의 이치를 묵상해 보는 초여름날이다.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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