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루터는 항상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에서도 역설적인 설명을 발견하게 된다. 오랫동안 진노의 하나님에 대해서 싫어할 정도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진노의 하나님께서는 반대로 사랑과 자비를 그가 만드신 만물에 드러내셨다. 진노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게 성경 속에다가 자신의 계시를 내리셨다. 때로는 보다 특수하게 개인별로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의 은총은 결코 종결되지도 않았고, 정의의 기준을 세워나가면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향한 초보적인 교사였다. 율법은 폐하여지지 않았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타났다. 그 때마다 인간이 회개하고 자신을 낮추어서 겸비해야만 했다. 은총은 인간에게 영적인 능력을 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한 행동으로 인간을 용서하시고 인간과 화해하시는 행위이다. 구원은 사람의 행위와는 관련이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곧바로 하나님의 저주가 된다. 오직 하나님만이사람을 변화시키실 수 있다.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없다.
루터에게서 단순하게 대조적인 관계가 드러나는 바, 율법은 죽이는 것이고, 복음은 살리는 것이다. 특히 로마가톨릭교회의 공로사상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구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루터파와는 달리, 칼빈과 개혁주의 교회들에 이르게 되면, 율법의 역할은 은혜 안에서도 지속적이다.

율법의 제1용법은 사회 속에서 악을 억제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회 내에서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일은 여전히 그 용도가 유효하다.

제2용법은 특히 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도록 두려움을 안겨주어서 구원을 준비하게 한다.
제3용법은 성도들로 하여금 기독신자의 생활을 위한 지침이 된다. 루터는 율법을 확정적이요 원리적인 용도로만 제시하였다.

칼빈은 율법의 여러 기능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성도의 마음속에서 죄를 확정케 하고 깨닫게 하는 율법의 역할들을 강조하였다.

4. 죄인이자 동시에 의인이다.

역설적이면서, 매우 결정적으로 단순하게 루터의 인간론을 표현한 문구이다. 루터는 사람은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이다”(simul justus et peccator)고 주장했다. 이는 자신의 인생에서 체험한 것들이라고 생각된다. 기독교인의 두 신분은 매우 역설적인 교훈에 사로잡혀 있었다. 루터의 신학을 대변하는 매우 유명한 개념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죄를 용서받았으므로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는 의인이다. 하지만 세상 위에서 자신의 눈으로나 이웃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부분적으로나마 죄인으로 보인다. 의인으로 인정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신뢰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소망 안에서는 의인이요, 실상은 죄인이다.

로마가톨릭의 선행주의와 공로사상을 거부하기 위해서, 루터는 유난히 믿음을 강조했다. 믿음은 그저 단순한 신념이 아니다. 믿음은 개인의 인격적인 고백이다. 성경에 나오는 기록들이 일반적으로 사실이라고 받아들인 역사적 믿음으로도 부족하다. 교회가 가르쳐주는 기준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교리적 순종이라고 착각해서도 안된다. 믿음은 마음의 생명을 유지하고는 요소라서 사람의 변혁과 거룩한 생활의 성장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칼빈은 루터의 역설적 인간론이 지닌 고민을 해결하는 대안으로, 고린도후서 5장 17절을 강조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다. 이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피조물이다. 칼빈의 설명에 의하면 비록 성도에게는 여전히 옛사람이 남아있지만, 그의 신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으므로 결코 죄인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